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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시 고성읍

프라하의 첫 영광, 비셰흐라드

by Total Eclipse





묘지를 가는 길이 이렇게 벅찰 일인가. 벅찰 일 맞다.

단순하게 가자. 책으로, 영상으로만 보고 들었던 역사적 인물을 대면할 수 있다. 잘게 바스러졌을지라도 그의 유해가 내 두 눈앞, 바로 여기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동시대에 살았다고 쳐도, 지극한 셀럽이었거나 철저한 무명이었을 그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희박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자연과 가까워진 지금이 절호의 찬스다. 영혼을 믿건, 믿지 않건 상관없다. 사후에도 영혼이 있으면 그의 영혼과도 교감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없다면 나는 철저한 유물론자가 되어 그의 유해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벅참을 더하는 것은 그들이 누워있는 곳이 언덕 위라는 사실이다. 이건 마치 천국을 오르는 것 같잖아. 전망이 일품일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걸음마저 하늘로 승천하는 계단을 밟는 느낌이다. 지상에서 솟아오른 공간에 모여있는 그들은 천사임이 분명하다. 축원과 추모, 일상과 휴식의 제단인 비셰흐라드 공원(Vysehrad Park)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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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_114339.jpg 비셰흐라드 공원을 오르내리는 길

블타바 강은 편안하게 흐른다. 비셰흐라드는 높은 곳(Vyse)에 있는 성(Hrad)이다. 우리말 지명으로 고치면 '고성(高城)'이다. 강원도, 경상남도가 아닌 체코에 있는 프라하시 고성읍 혹은 고성면. 즉물적인 이름이라 더 매력 있다. 프라하시 고성읍에 사는 주민들이 산책코스로 삼고 있을 게 분명한 비셰흐라드 공원은 사랑스럽다. 숨이 약간 찰 정도의 경사를 지나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고 나면 녹색의 한가로움이 방문자를 환영한다. 깔끔하게 가꿔놓은 우리나라 공원에서 가장 불만스럽던 그것.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란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잔디가 망가질까 봐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과거는 원망스럽지만, 이제는 자칫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중증 열성 혈소판감소 증후군'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정체를 해석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이 병의 원인이 되는 건 진드기. 광활한 잔디에 뛰어들어 뒹굴고 온몸에 초록 풀물이 들었던 때는 도대체 언제였던가. 체코 진드기의 위력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프라하 시민들은 괘념치 않는다. 넉넉한 오후가 흐르고 있다.

20240818_113833.jpg 비셰흐라드 공원
20240818_113843.jpg 비셰흐라드 성 베드로와 성 바울 대성당

8월의 하늘과 나무는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덥지 않은 날씨.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꺄르륵 소리는 달콤하기만 하다. 묘지 탐방의 조급증은 날아갈 듯 살랑거리는 감상과 비셰흐라드가 품고 있는 원초적 기운 덕분에 맥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지금도 요새의 흔적이 남아있는 비셰흐라드는 한갓 성이 아니다. 정통 체코 역사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프르제미슬 왕조(867~1306) 전반기의 왕궁이 있던 현장이다. 12세기 중반 흐라드차니의 프라하 성으로 궁을 이동하면서 점차 쇠락하게 되지만, 보헤미아 왕국의 심장이었던 비셰흐라드의 무게감은 떨쳐낼 수 없다.

공원의 한쪽에는 체코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부부의 동상이 있다. 지금도 체코 어딘가의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을 오페라 <리부셰>는 농부 프르제미슬을 만나 왕조를 건설한 리부셰 공주의 건국신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체코 국민들의 국모나 다름없는 그녀는 지금도 프라하 도심 곳곳에 조각으로, 동상으로 굳건히 서 있다. 비셰흐라드의 리부셰는 당당하게 서서 미래를 불러오는 기세고, 남편 프르제미슬은 그녀의 곁에 앉아 보위하는 모양새다. 리부셰 공주가 프라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언했던 장소도 이곳이었다고 하니, 비세흐라드는 체코 민족의 본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0240818_114033.jpg 비셰흐라드 공원의 리부셰 공주 부부 조각상

도시를 대표하는 교회나 성당에 묻히는 것은 가문의 영광. 교회의 뜰이 아니면 근처의 땅에라도 누워 영생을 기도했던 유럽인들의 절대적인 소망. 그래서 비셰흐라드에 우뚝 솟은 성당의 곁에도 국립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묘지에 들어가기 전 성당을 먼저 봐야겠다. 욕심이 많은 곳이라 궁금증이 도져서다. 성당이나 교회 내부에 예수의 여러 제자와 복음서 저자, 혹은 천사들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모시고 있기는 해도, 한 곳이 한 성인을 모시는 이름을 취하는 게 보통인데, 비셰흐라드 성당의 이름은 'Bazilika svateho Petra a Pavla'. 그러니까 '성 베드로와 성 바울 대성당'이다. 베드로도 기리고 바울도 모시는 성당인 셈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와, 열 두 제자엔 포함되지 않아도 박해자에서 순교자로 극적 회심을 한 사도 바울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전 세계의 성당에서 모시는 인물 랭킹 1,2위를 차지하는 대형 스타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성 바오로 대성당'이 입에 착붙하는 까닭도 그들의 유명세에서 비롯된다. 가공할 규모의 바티칸 대성전조차 '성 베드로' 한 분의 이름을 기리고 있는데, 프라하 비셰흐라드의 언덕의 성당은 통이 크다고 할 수밖에. 내막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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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바티칸 광장의 성 베드로 (우)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성 바울

성화(聖畵)나 성상(聖像)에서 베드로나 바울을 알아차리긴 어렵지 않다. 그림이나 조각에서 열쇠를 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가 바로 베드로다. 예수가 그를 신임하며 건넸던 천국의 열쇠가 상징물이 된 것이다. 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다. 오픈런으로 Knockin' on heaven's door 할 필요 없이 무려 다이렉트 천국행 키를 쥐고 있던 거니까. 바울의 상징물은 긴 칼이다. 그가 순교할 당시 로마 제국의 시민권자였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십자가형 대신 그나마 나은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많은 크리스트교의 성인들은 순교 당시 처형되었던 도구나 무기가 그들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그래도 그렇지 천국의 증표인 열쇠와 처형도구인 칼의 이미지 차이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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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_110933.jpg 성 베드로와 성 바울 대성당의 외부와 내부
20240818_110710.jpg 중앙 제단의 하부 중앙에 조각되어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제단을 보라. 열쇠를 든 베드로와 오른손으로 긴 칼을 쥐고 있는 바울이 딱 붙어 서있다. 성당이 두 성인을 동시에 모시고 있어 욕심꾸러기라고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실은 베드로와 바울은 성화나 성상에서 함께 기리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인 단짝이다. 둘은 크리스트교 박해 시절인 로마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서기 67년에 체포되어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처형을 당했다. 이렇게 표현하자니 불경스럽고 송구하지만, 그야말로 감방 동기였던 거다. 한 제단 두 성인을 모시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1070년대에 지어진 후 양식을 바꿔가며 수 차례 재건을 거듭한 성 베드로 성 바울 대성당에선 감미로운 성스러움이 감돈다. 거대하지 않은 성당 내부의 차분한 공간감도 한몫했겠지만, 프라하 성 안의 성 비투스 대성당처럼 이방인이 득세하는 스쳐 지나감의 공간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비셰흐라드를 오른 방문객은 혹여 그가 이방인일지라도 구도자의 속성을 품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성당은 수더분하고 밝은 경건함으로 풍만하다.

20240818_112023.jpg 비셰흐라드 묘지 입구

구시가지에서 바로 추모의 공간으로 갈 것처럼 유난을 떨었는데 언덕의 공원과 성당에 넋을 잃고 말았다. 비셰흐라드의 메멘토 모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성당이 서있는 바로 옆, 묘지의 입구가 보인다. 프라하 내러티브의 보석 같은 마무리는 비셰흐라드 묘지의 이야기다. 체코와 프라하 그 자체인 묘지의 주인공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여정의 핵심이다.

하늘은 맑고 묘지는 선명하다. 추모객들을 맞이하는 비셰흐라드의 영혼들은 들떠있는 게 분명하다. 수런수런 방문자들의 대화에 일렁일렁 그들의 심장 박동이 되살아나 섞이고 또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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