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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대지만 천국은 가고 싶어

체코의 정신, 비셰흐라드 묘지 ①

by Total Eclipse





인본주의라는 호수는 산업혁명과 함께 유럽인들의 발목을 적시다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턱밑까지 차오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철학적이건 존재론적이건 인간이 근본이고 우선이라는 게 인본주의라고 한다면, 이전에도 인본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배출된 수많은 철학자 군단을 보라. 4 원소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학파도 있었지만, 결국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필로소퍼들은 그들 자신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사랑해 마지않는 집단이었다. 그럼 그게 인본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시대보다 인간의 능력개발에 진심이었던 그리스의 인본주의는 근현대의 인본주의와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 것일까.

'신의 개입' 여부다. 인간의 사유능력을 중시한 고대 그리스는 동시에 신들의 천국이었다. 화려한 라인업의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은 인간미가 흘러넘쳤다.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고 술에 취해 실수투성이인 신들은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슈퍼히어로들이다.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해도 신은 신인 것. 이들은 인간의 삶을 관통해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그리스의 인본주의는 '인본주의: 그러나 신과 함께 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크리스트교의 공인 이후 중세가 저물 때까지는 유일신의 위력이 사람들을 집어삼킨 시기다. 인간은 신을 찬양하기 위한 존재 그 자체. 사후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신을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로 떨어질 테니 알아서 하던가. 인간의 삶은 하늘 위 단독자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대반전은 이때부터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과학의 급발진을 이끌고 산업혁명이 자본주의의 급가속을 하면서 니체의 말마따나 "신은 죽었다." 이후에 피어난 인본주의라는 꽃은 그리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향기를 지녔다. 산업혁명은 인간이 이루어낸 기술력으로 가능했던 것이고, 자본주의도 인간의 생산과 소비능력을 바탕으로 정립된 것이니까 근대 이후의 인본주의에는 신이 개입할 여지도,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인간의 인식은 어떤 식으로 변해왔을까.

비셰흐라드 묘지의 다른 출입구

신이 존재했던 시대의 죽음은, 특히 절대적 유일신 치하의 죽음은 인간이 바라 마지않던 이벤트였다. 그럴 수밖에. 평생을 신을 섬기며 기도과 영광을 바쳤고, 심지어 교회에 막대한 재산을 바쳐 면죄부까지 받았는데 죽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방법은 없다. 태생적으로 죄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하느님에게 충성을 다해 사후 천국으로 올라가 영생을 만끽하는 것 외의 목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죽음은 일생일대의 파티가 아니면 무엇이랴. 곧 천국의 문으로 발을 내디딜 사자(死者)는 축하받아야 할 파티의 주인공이다. 무수한 질병과 보잘것없던 의학기술의 탓으로 죽음은 더더욱 일상적이었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자 서로의 파트너로서 기능했다. 슬프긴 하지만 축하해야 마땅한.

자본주의 시대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신은 없고, 유물론과 인간의 능력만이 전능하다. 신에게 기도할 그 시간에 생산하고 소비하라. 살아서 누리고 거둬야 한다. 빅뱅 이전의 신비함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탄생의 순간부터 진행된 모든 것은 이제 과학이 친절하게 설명해 드릴 수 있다. 과학은 곧 인간이다. 영혼이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뜬구름이고, 죽음은 따라서 가혹하기 그지없는 인간 전존재의 절멸이다. 신 인본주의 시대의 죽음은 삶으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이다. 기피해야 하고 모른 척해야 하는 터부가 되었다.


신의 부재 속, 프라하의 언덕에 늘어서 있는 묘비들은 그렇다면 시대에 어떤 식으로 편승했을까. 간단치 않은 질문이다. 비셰흐라드 묘지는 1869년, 성 베드로와 성 바울 교회의 곁에 둥지를 텄다. 가파른 자본주의의 성장 시기에 유일신의 가호를 바라는 형용모순의 현장인 것인가. 신에서 인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고 해도 유럽인의 뿌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단독자에 대한 믿음이다. 대놓고 신이 심판할 사후세계가 전부라 외칠 수는 없지만 천국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터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하느님께 은총을 비는 기도를 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묘지는 현세에 기대야 하며 내세에도 의지해야 한다. 거죽뿐인 삶을 졸업한 것이니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어도, 인본주의의 정신 그대로 세상의 발전에 헌신했던 고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장식이 요구된다. 결국 19세기의 묘지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애매한 힘조절에서 우리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여정의 첫 번째 추모의 공간인 비셰흐라드 묘지 입구를 넘어선다. 일상의 형이상학적인 경계선을 넘어선 것일 텐데 아무런 이질감이 없다. 한눈에 바라본 묘지의 비석들은 지나치게 밀착해 있는 듯보여도 저마다의 형상을 이루며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서유럽과는 미묘하게 다른 동유럽의 공기가 묘지의 상공에서 순환하는 느낌이다. 어딘가에 체코민족의 셀럽들이 누워있겠지만 어느 비석 하나 기죽지 않고 차분하게 저마다의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바래지는 비석들의 색과 묘지 주위의 풍광은 금세 어우러져, 단시간에 만들어낼 수 없는 고색의 명화(名畵)를 창조하고 있다. 어느 한 자리 버릴 수 없는 체코인들의 거룩한 공간이다.

비셰흐라드 묘지 내부

체코어로 쓴 묘비 위의 정보는 이름과 숫자를 빼면 낯설다. 시각 정보가 뉴런의 해석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해 버퍼링만 연속된다.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며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했던 체코민족의 과거는 일제의 탄압시절 우리와 놀라울 만큼 닮아서, 그들의 모국어 사랑은 각별하다. 세워진 시기를 막론하고 모든 묘비의 글자가 힘이 넘치고 또렷하다. 내 생전의 모든 것을 체코어로 명명백백하게 새기고 가겠노라, 망자의 각오가 들리는 듯하다.

체코의 국민작가 얀 네루다의 묘비가 보인다

첫 번째로 마주친 명사다. 카를교의 서쪽,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네루도바 거리(Nerudoca Ulice)'가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로, 얀 네루다(Jan Neruda,1834~1891)는 설명이 필요 없는 체코의 국민작가다. 실제로 얀 네루다는 그가 사랑하던 말라스트라나 거리의 인간군상을 다룬 단편 모음집, <말라스트라나 이야기>를 썼다. 이 소설의 묘사를 읽어 내려가면 150년 전 프라하의 길거리와 시민들이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같은데, 지금까지도 프라하와 얀 네루다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상찬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중반 칠레의 민중시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는 얀 네루다를 추앙하는 마음으로 필명에 네루다를 차용했다고 한다. 얀과 파블로. 누가 누군지 헷갈려하거나, 아예 한 사람인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확실하게 하자.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를 배출한 체코 문학의 힘은 연원이 깊다. 1 급수의 샘에서 맑은 물이 용솟음치듯, 선대의 문장력은 대를 이어 체코인의 DNA에 복제돼 도무지 상실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제 비셰흐라드의 진정한 슈퍼스타들을 기릴 시간이다. 문학의 얀 네루다보다 뛰어난 인물이라서이기보다는 그들의 묘비 자체가 비셰흐라드의 상징이 되어 버린 덕이다. 군말 없이 그 앞으로 향하는 게 참된 참배객의 자세일 것이다. 동유럽의 보석 같은 묘지를 찾은 단체관광객들은 호기심 반, 추모의 마음 반이다. 묘비에서 묘비까지의 한 걸음 한걸음이 꽤나 되직하고 묵직하다. 묵직하되 무겁지 않은 신령함으로 나도 체코 음악의 대명사인 그들을 향해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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