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정신, 비셰흐라드 묘지 ②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 1824~1884)의 묘지는 비셰흐라드 국립묘지의 아이콘이다. 아무리 뻔한 여행을 혐오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셰흐라드까지 와서 스메타나가 누워있는 현장을 무시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장르 불문 수많은 예술가들이 묻힌 비셰흐라드 국립묘지지만 추모는 체코 국민음악의 대가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단 위의 오벨리스크 세 개가 허공을 수직으로 가르고 있다. 삼지창인가. 경쾌하다. 경쾌하나 스메타나의 음악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묘지 안을 탐방하는 관광객들의 소음은 추모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프라하 여행객들에게 비셰흐라드는 선순위 명소까지는 아닌 듯하다. 덕분에 묘지 공간으로 빠져들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다. 묵직한 공기의 흐름이 안단테인 이곳에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á Vlast)>을 듣는 감동은 극상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스메타나와 비셰흐라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앞서 소개한 오페라 <리부셰>는 스메타나의 작품이다. 체코의 시원이 형상화된 리부셰 부부의 동상은 비셰흐라드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신화적인 교향시 <나의 조국> 중 세계인들의 귀에 가장 익숙한 제2곡 '블타바'는 제1곡인 '비셰흐라드' 언덕에서 조망할 때가 제격인 프라하 젖줄의 이름이다. 스메타나의 오페라와 교향시 모두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작품이라고 들었지만, 민족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하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서사가 보헤미아의 선율에 담겨도 그만이다. 가슴속에 들어찬 무엇인가가 고통에 이어지는 쾌감으로 본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나의 조국>은 체코의 건국신화를 비롯해 인물과 자연경관을 찬양하는 내용의 연작 교향시다. 1879년에 총 여섯 곡이 완성됐는데, 1곡 '비셰흐라드', 2곡 '블타바'에 이어서 3곡 '샤르카', 4곡 '보헤미아의 들과 숲에서', 5곡 '타보르', 마지막 6곡은 '블라니크'로 구성되어 있다.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을 만들어간 시기는 그의 청력 상실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나이 오십의 작곡가는 제3곡을 작곡할 무렵엔 완전히 청력을 잃은 상태였으며, 그 이후로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음감에만 의존해 명곡을 완성해 내는 저력을 보인다. 왜 하필 작곡의 대가들에게 청력 상실이란 청천벽력이 주어졌을까. 잔인하다. 베토벤은 발진티푸스의 부작용이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하고, 스메타나는 인후염이 최초 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동네 내과나 이비인후과에서 항생제만 처방받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병인들. 현대의 작곡가들은 행복하다.
스메타나의 일생을 톺아보면 자꾸 따라붙는 무엇이 있었다. 거 참 희한하다. 체코 맥주의 마력에 빠진 사람들이 그리 많다던데, 그래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메타나는 맥주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출생부터 그랬다. 그의 아버지 프란치셰크 스메타나는 리토미슐(Litomyšl)이라는 도시의 커다란 맥주 양조장 주인이었다. 열 명의 딸을 낳은 뒤 처음으로 아들 베드르지흐를 얻은 아버지 프란치셰크는 모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맥주 파티를 벌일 정도의 재력가였다고 한다. 재능이 넘치는 아들, 스메타나의 음악 교육에 바탕이 된 것은 황금빛 맥주였던 것이다. 청소년기 프라하를 거쳐 플젠(Plzeň)의 김나지움 학생이 된 스메타나는 한껏 고양된 작곡의 열망으로 초기 작품을 내놓게 된다. 플젠이 어딘가, 환상의 목 넘김을 시전하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본산이다. 맥주 덕후들의 성지인 이 도시는 뒤에서 방문해 보겠지만, 스메타나의 블타바는 맥주로 채워져 흘러갔을 것만 같다. 맥주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 동반자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 스메타나가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원을 방문한 그의 지인은 스메타나가 하루 종일 맥주와 와인만 마시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곡가의 가족에게 보냈다. 생의 끝자락을 직감한 스메타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지막 보물로 체코의 맥주를 선택한 것이다. 양조장 아들로 태어나 맥주와 함께 숨을 거둔 스메타나. 그러니까 체코의 음악에는 보헤미아의 황금빛 맥주가 녹아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프라하에서 인스타 감성의 사진을 바란다면 블타바 강변을 따라 이어진 둑방길이 최적의 스폿이다. 관망하는 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우수에 젖을 수도, 벅참에 몸을 가누지 못할 수도 있는 공간의 연속이다. 프라하 시에서는 그래서 소중한 둑방길에 체코민족의 위인들의 이름을 선사했는데, 드보르자크 둑방길, 마사리크 둑방길, 베네쉬 둑방길 등을 거닐 수 있다. 압권은 스메타나 둑방길인 '스메타노보 나브쉐시(Smetanovo nábřeží)'. 박제가 된 프라하의 풍경사진 중 프라하 성의 야경을 멀찍이서 포착한 프레임은 오직 이 길에서만 가능하다. 블타바 강의 전경과 그 너머 카를교, 프라하 성의 후경이 일품인 둑방길의 알파 메일은 스메타나의 차지인 것이다. 프라하 시내에서도, 비세흐라드의 언덕에서도 스메타나는 체코의 정신이다.
성긴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자박자박이다. 동네의 시골길을 지르밟을 때의 감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체코 음악의 정수를 뽑아낸 인물이 묻혀있어서인지, 비셰흐라드의 자갈을 밟는 소리에는 리듬감이 주어진다. 청력이 이렇게 민감해질 수 있는 건가. 둥근 자갈의 위를 밟는 소리와 각진 자갈의 모서리를 비껴 밟는 소리조차 구분이 가능하다. 건국의 증인들이 블타바 강을 내려다보았던 비셰흐라드 언덕에선 체코인들의 소유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나의 조국을 외칠 수 있는 곳은 그들의 정신이 묻혀있는 곳 외에 또 어디가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