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
“애월 어때, 애월. 핫하다며?”
“그래 나도 들었어, 애월로 가지 뭐.”
난감했다. 애월 어디로 가자는 건지…. 오랜만에 재회한 서울 촌놈들의 요구.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줄 놓고 살다가 갑자기 제주에 갈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TV와 SNS에서 애월의 명소들이 소개되고, 많은 연예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애월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생길 법도 하니까.
지금은 동쪽으로 이사를 간 이효리 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속물로 보이긴 하겠지만 덕분에 땅값도 제법 올랐고, 주변에 힙한 레스토랑도 많이 생겨 그럴싸한 외식도 가끔 하게 됐으니 말이다. 몇 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뀐 건 사실이다. 단순한 마을의 외양뿐 아니라 ‘애월(涯月)’이라는, 온몸이 축 늘어질 듯 감성적인 이름을 가진 이곳의 지명도도 그렇다.
“애월 어디로 가자는 건데? 꽤 넓어 애월은. 중산간 쪽인지 바다 쪽인지 콕 집어 말해봐.”
대부분은 바다로 가자고 한다. 하긴 남국의 바다를 보는 게 그들에게 흔한 일일 리 없다. 다만 제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애월 바닷가는 꽤 터프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다. 한없이 평화로운, 드론 촬영본의 에메랄드빛 감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독 절벽 위 구간이 많은 애월의 해안도로에서는 인정사정없이 ‘짙’푸른 바다가 보인다. 현무암을 때리며 만들어진 포말과 더불어 심연이 상상되는 공포심마저 주는 것임을.
숨 막히는 도심에서 제주의 풍경으로 그들을 초대하고 나면 이후의 접대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탐라의 정취를 온몸으로 흡수해버리겠다는 듯 엔도르핀이 완충돼 있으니 뷰가 만족스러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드라이브를 한 뒤 저녁으로 회를 먹는 스케줄을 잡으면 별점 5개 주겠다는 찬사를 받기 마련이다. 가볍게 시작해보자, 애월에서의 커피 한잔이다.
애월의 카페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어찌 그리 견뎌왔을까. 아직도 깜빡하고 외출하면 금착헐(깜짝 놀랄) 정도로 마스크는 우리의 1순위 필수품이지만, 지난 2년여의 봉쇄에 비해서는 한결 숨통이 트이는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 사실이다. 위 아래로 날개까지 달려 한층 무게감 있어 보였던 흰색 KF94등급의 마스크에서, 얼굴형과 의상에 맞춤한 개성 있는 마스크들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위기의 일상화 아닐까. 이제 마스크는 패션이다. 어차피 써야 한다면 예쁘게 쓰는 거지 뭐. 그렇지 않으면 이 지독한 전염병의 악몽이 더욱 생생하게 소환될 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번 커다란 고비를 넘어서는 중이다.
언젠가부터 한담해변의 카페들이 육지인들의 핫한 성지가 되었지만 이젠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한 구역에 몰려 있는 카페의 군락보다는 나홀로 숨어 있는 은둔의 강자들이 주목받는 시기라고 할까. 핀포인트 탐색이 가능한 대한민국에선 그곳이 어디에 숨어 있건 문제가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제주섬
고도를 낮추자 허물을 벗은 듯 섬의 자태가 드러난다. 시야가 좋은 날, 비행기의 자그마한 창 너머 보이는 제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치명적일 뿐. 며칠간 섬의 모든 것을 만끽할 작정인 여행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여행의 진정한 첫 페이지와 다름없다.
땅에 내려 바라보는 제주보다 하늘에서 조망하는 제주가 더 매력적인 것은, 항공 뷰라는 벅참에 더해 색감의 조화와 대비를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섬의 경계면에서 느껴지는 깊은 푸름과 흑갈색의 대비, 더불어 짙은 초록의 밭들과 그 밭들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의 검은 윤기는 이국적인 색의 어우러짐을 펼쳐내 보인다. 이것은 오로지 보색의 효과일 뿐인가.
바다와 뭍 사이엔 세월을 품은 현무암의 무더기가 해녀들의 전쟁과 안식의 공간을 가르고 있고, 초록의 밭과 검은 돌담의 경계에선 제주인들의 운명이 교차해왔다.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오름의 갈색 초입엔 조상을 모시는 산담의 검은 빛이 유독 시선을 잡아끈다. 삶과 죽음, 자연이 한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순환하며 제주의 풍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도바당
전국 최고로 운치 있는 커피를 애피타이저 삼아 한 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올레꾼도 될 계획이지만 오늘은 첫날이니 일단 차창 밖으로 애월의 인상을 예습. 중산간의 고즈넉함을 눈에 담은 뒤 다시 동에서 서로 해안가 탐색. 이제 출출해질 시간이다. 제주 방문객의 절대다수가 고집하는 갈치구이와 흑돼지 오겹살. 좋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그래도 소중한 친구들이니 남들과는 대접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고등어다. 제주 맛집에서 주로 나오는 고등어 ‘구이’나 ‘조림’이 아닌 고등어 ‘회’다. 운송과정에 기절을 시켜서라도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고등어회의 제1과제인데, 이곳에선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고등어 회
간접광고에 따른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마음껏 특정한 식당과 그곳의 음식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나만의 글을 쓰는 기쁨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현지인 맛집’이었기 때문에 먹는 방법을 따로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제법 입소문을 타고 외지인들의 방문도 잦아지니 한쪽 벽면에 ‘고등어 회 먹는 방법’까지 안내되어 있다. 간을 하지 않은 날김을 상추 삼아, 초를 친 시큼한 밥과 양파에 얇게 썬 고등어 회 한 조각. 거기에 양념장을 더하면... 오호, 이것이 바로 ‘천상의 맛’인가. 다른 어종에 비해 유난히 회로 먹기 기피하는 이가 많은 고등어다. 그 느낌 이해되지만 모든 선입견 놓아두고 일단 입 안으로 초대해 보시라. 후회하지 않으실 테니.
평생 잊지 못할 맛이라 직감한 뒤 언젠가 이곳을 회식 장소로 점찍고 예약 전화를 했더랬다. 고등어회 맛은 기본이고, 바다를 불과 10미터 앞에 둔 뷰 맛집이기도 하니 두말할 필요 없었으니까.
“내도바당이죠? 14명 내일 모레 저녁에 예약이 될까요?”
3초간의 정적을 깬 주인장의 답변. 차분한 목소리.
“에구, 아시면서... 저희는 마을 단골 손님들이 매일같이 오셔서 단체 예약은 안 받아요.”
이거였구나. 진정한 맛집이란 것이.
아, 한 가지만. 이 횟집은 애월읍이 아닌 제주시 내도동에 있다. 그러나 내도,외도동은 애월읍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고, 앞에 펼쳐진 바다는 더욱 경계를 초월한 공간이 아닌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번지’ 에 살았던 나는, 도로명 주소 덕에 주소란을 단출하게 채워도 좋았다. 그저 ‘제주시 엄수로 ***’. 담백하지만 무언가 허전한 감도 없지 않다. 다른 읍면과 마찬가지로 애월읍의 마을 이름은 참으로 아름답다. 고내리, 유수암리, 금성리, 그리고 그 유명한 소길리 등. 또 중산간 지역에는 ‘납읍리’가 있다. 오래전 제주에서 순환근무를 했던 아나운서 선배가, 뉴스 도중 ‘납읍’이라고 쓰인 원고를 오타라고 짐작해 ‘남’읍이라고 알아서 고쳐 발음했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른다.
“뭔가 이상하지 않니, ‘납’읍이? 있을 법한 이름은 ‘남’읍 아니겠어? 그래서 고쳤지 뭐.”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선배의 실수담이다.
제주도내 전 지역이 비슷하지만, 애월을 여행할 때도 도로명은 꽤 쏠쏠한 힌트가 되기도 한다. 유독 제주에는 도로의 명칭에 그 길이 걸쳐 있는 양 마을의 이름이 한 글자씩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장유길(장전리~유수암리), 엄수로(구엄리~수산리), 하소로(하귀리~소길리)라는 도로명에는 길의 시작점과 종착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막강한 내비게이션의 위력을 생각하면 굳이 알아둘 필요가 없는 상식일지 모르나, 머릿속에서 나의 좌표를 그려 넣기에는 유리하다. 그리고 그저 재미있지 않은가, 도로명을 보고 마을 이름 한번 맞춰보는 것도.
제주의 도로 이정표
‘애월(涯月)’이란 이름에서 달이 있는 밤 풍경을 빼놓는 것은 실례다. 애월 바다가 거울이 되어 보름달을 하나 더 탄생시키는 날엔 누구라도 풍경의 일부로 녹아든다. 조각으로 나뉘는 감상보다는 자연과의 합일로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들기 마련인 애월의 밤바다. 바다도 저 하늘의 달도 사라질 리 없는데, 아침이 되면 우리는 현세의 질서 속으로 발을 들여놓고 어젯밤의 일체감을 일상의 소음 속으로 날려버린다. 애월에 뜨는 달을 언제고 다시 소환하기 위해 한 편의 시라도 남겨두었으면 좋으련만. 느낌을 압축하는 능력의 부재로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이다.
해안도로에서 달을 바라보며 듣기에 제격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부제 <월광(月光)>은 ‘달빛을 받을 운명’이라고 해석되는 사주의 명칭이라고도 한다. 자연의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것이 사주일 테니 달의 기운으로 풀이되는 운명이리라. 진지하게 파고들 의도는 없으나 월광의 운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주목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니, 그 풀이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의아한 게 있다. 왜 찬란한 ‘햇빛’이 아니라 ‘달빛’이 주목을 받을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화창한 날에 해를 바라보면 알게 될 일이겠다. 실명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쨍하고 뜬 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태양을 피하는 방법’까지 노래했을까.
달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는 부끄러워할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넉넉하게 바라보도록 순하게 자신을 허락할 뿐이다. 되레 숭고한 감정들까지 덤으로 얹어주지 않던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함이었다는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스스로 열을 내며 타오르는 해와 달리, 달은 아무것도 뿜어내지 않는다. 그저 해가 쏜 빛을 반사해 선물할 뿐. 선한 느낌으로 주목받기 위해선 해보다는 달이 되어야겠다.
여기는 애월이다.
다시 아침이다. 애월의 해안도로를 달린다. 벗들과의 시끌벅적함은 잠시 미뤄야겠다. 숙취가 원인인 건지, 제주는 오직 들뜨는 낭만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직감한다. 온몸으로 침투하는 칼바람쯤은 견뎌내야 이 섬에 발을 들여놓을 자격을 갖출 수 있을 듯하다. 낮은 하늘과, 현무암을 때리며 흑백의 대비를 만드는 하얀 포말은 여행자의 사연이 무엇이든 상념을 토해내라고 부글거릴 뿐이다. 지쳐 흔들렸던 영혼의 한 꺼풀이 거침없이 벗겨짐을 느낀다. 바다가 있고, 하늘이 있고, 달이 떠 있는 애월은 누구의 심장이든 거침없이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모든 걸 내어놓고 그저 안겨보아야겠다.
애월의 품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