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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겹 뒤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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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2. 2022

Chapter1 오멍가멍
-당신만의 공간은 어디인지

대정읍 모슬포항~형제해안로

살금살금 뒤따라갔더랬다. 들키면 제대로 된 대화를 들을 수 없었기에. 흔치 않은 기회이니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무사 삐삐 쳠수과, 막 마시기 시작해신디.”

제주가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취업 준비로 서울에 살고 있던 친구와 가끔 찾았던 방화동 포장마차, 마지막은 항상 후루룩 들이켜는 우동 한 그릇이었다. 그날 역시 한두 잔 술이 들어가고 슬슬 발동이 걸릴 참, 친구의 허리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녀석의 어머님이 삐삐를 쳤단다(삐삐는 ‘쳐야’ 맛이었다). 친구는 막 시작된 술자리의 흥이 깨진 것이 못마땅한 듯 약간은 귀찮은 표정이었다. 이런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휴대전화는 언감생심이던 시절. 포장마차 옆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친구가 들어갔고, 그토록 기다리던 미지의 세계인 제주도 가족 간의 대화를 몰래 엿들을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면 내심 “이런 말이었지?” 하고 해석 능력을 자랑할 참이었으나, 시도 자체가 허사였음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본토 출신이 제대로 구사하는 제주어는 거의 외국어 수준. 결국 건방진 해석 대신 겸손한 자세를 갖춘 정중한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문장의 끝을 그렇게 올려야 하는 거야?”

“기이~는 정확히 언제 쓰는 말인데?”

“왜 죄다 받침을 빼는 건데? 이서 어서가 정말 있어 없어 맞아?”

친구의 고향은 제주의 남서쪽 마을인 모슬포였다. 그의 전화 통화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당시엔, 훗날 내가 20년 가까이 제주에서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지금 이 순간 산방산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그가 아닌 나라는 사실이 닭살마저 돋게 만든다.

모슬포-산방산 해안도로의 초입.

누구나 나만의 공간이 있다. 그곳에선 내가 진짜 내가 되는. 그 신성한 장소의 바람과 공기는 피부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몸속을 통과해 거스름 없는 황홀을 선사한다. 물아일체와는 다른 ‘소아일체(所我一體)’의 감각이라 하면 될는지. 꼭 거칠 것 없는 풍경의 바닷가나 깊은 산속일 필요는 없으리라. 늘 마음이 편해지는 단골 카페일 수도 있겠고, 도시의 야경이 기막힌 하숙집 옥상이어도 좋을 것이다.

모슬포항에서 시작되는 해안도로는 송악산과 산방산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숨을 들이쉬면 제주의 기운이 폐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다. 좌측에 우뚝 서 있는 산방산과 오른편에서 철썩이는 짙푸른 바다는 운전자의 현실감각을 삼켜버리고 만다. 산방산 뒤로 한라산의 능선이 섬 전체를 덮고 있고, 반대편 멀리에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물수제비를 뜨기 안성맞춤인 납작한 돌 마냥 바다 위에 떠 있다.

오가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 이곳. 터럭 하나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과 빛나는 바다, 그리고 바람에 저항하는 나 자신뿐. 남녘을 굽이치는 도로는,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펼쳐진 공간이 되어버린다.

도로를 달리던 차는 송악산을 오른쪽에 둔 오르막의 시작점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오르막길 너머 전방의 풍경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설렘과 긴장감으로 다시 페달을 밟는다. 어느 정도는 속력을 내야 한다. 너무 천천히 고개를 넘어가면 찰나의 반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동승자가 있다면 기대하라고 해야 한다, 반드시. 모두의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니까. 자, 때가 되었다. 하늘로 이어질 듯한 고갯길의 정점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다. 도로의 절단면을 가뿐히 넘어서는 순간, 눈앞에 마술이 펼쳐진다.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비현실적 스크린이 급작스럽게 보는 이를 압도한다. 겁박하며 기를 죽이는 압도가 아니다. 심장을 강타하며 박동 수를 높이는 감탄과 환희의 압도이다.

해안도로의 오르막을 넘자 보이는 산방산과 형제섬, 그리고 멀리 한라산

바다 위 형제섬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산방산을 바라본다. 완만한 초가지붕의 곡선처럼 부드러운 능선을 자랑하는 제주 오름의 스카이라인에 익숙해진 두 눈에는 산방산의 수직적 질량감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오기 마련일 터. 바다를 향해 질주하듯 뻗어 있는 이웃, 송악산과 함께 도내에서 몇 안 되는 ‘산(山)’의 명칭을 가진 제주 서부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틀 이상의 여정이 보장된 관광객들은 제주를 동서로 나눠 여정을 짜곤 한다. 동선의 효율성을 따진다면 바람직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박수를 보낸다. 숙소를 한 곳에 정해두어야 한다면 제주시나 서귀포시의 정중앙 부근에 잡아야 동서 여행의 비중을 공평하게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반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게 어떨까. 바다의 조망에 거칠 것이 없을 테니 말이다.

동서로 나누는 여정 이야기가 나왔으니 살짝 정색해보려 한다. 현재 제주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양 행정시 체제이다. 구좌읍, 애월읍, 표선면, 한경면 등의 읍면이 그대로 존재하되, 섬을 동서 방향으로 자른 선을 기준으로 북쪽의 기존 제주시 동 지역과 읍면은 모두 제주시에 속하고, 서귀포 동 지역과 남쪽의 읍면은 서귀포시의 하위 행정조직에 포함된다. 읍이나 면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사는 곳이 드러나는 것이다.

제주의 이전 행정구역

위 지도는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한 2006년 이전, 25년여 간 유지되었던 제주의 행정체제를 나타내고 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 그리고 북제주군, 남제주군의 2시 2군 체제였다. 당시엔 특별자치도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도지사의 권한은 지금보다 제한되었고, 반대로 시장과 군수의 영향력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총 4개의 시, 군이 존재하는 데에서 오는 매력은 ‘문화’의 영역에서 뚜렷했다. 제주에서 열린 많은 축제에서는 각 시, 군이 자랑하는 풍습과 특산물이 경쟁적으로 홍보되기 바빴고, 도민체전 기간에는 각자의 시군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발현되기도 했으니까.

새롭게 닻을 올린 특별자치 시대는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모든 도민이 자치도시의 선점효과를 기대하며 의사와 정책 결정의 단순화에 동의한 결과, 북쪽은 제주시, 남쪽은 서귀포시로 통합되고, 양 행정시의 시장은 제주도지사가 임명하는 개혁안이 현실화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민들은 특별자치도 산하 양 행정시로 인한 불편함과 폐해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다시금 행정체제 개편 작업에 착수했으나, 한번 바뀐 체제를 다시 흔드는 작업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 중앙 정치권의 논리와 마찰이 불가피했고, 개편추진위와 도의 불협화음도 첨예했다. 의회 내부와 도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서로 다른 목소리는 합의로 굴러가는 바퀴에 제동을 걸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지금도 개편 논의는 답보상태다. 그러나 제왕적인 지사의 권한을 적정 수준으로 제한하고, 특별자치의 섬 제주를 더욱 빛나게 할 새로운 행정체제 안이 상당한 단계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양 행정시, 그리고 과거의 남제주군, 북제주군을 대신할 동제주, 서제주군(郡)의 ‘4개 시군 시즌2’ 체제가 그것이다.

현행 제주시, 서귀포시의 2행정시 체제

제주시, 서귀포시, 동제주, 서제주로 분할되는 개편안

섬 안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주민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제주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해도 오래된 ‘이주민’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선 이런 주장이 경솔하게 비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진격할 수밖에.

먼저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동 지역은 과거처럼 주거가 밀집된 구역까지만 ‘시(市)’로 경계를 짓는 편이 좋겠다. 특별자치도 이후, 제주 시내권과 멀리 떨어진 한경면이나, 서귀포 시내에서 한참 먼 성산읍조차 각각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편입돼 동질감 없는 시의 산하 구역이 되었으니 말이다. 행정체계의 간소화를 위해 만들어진 양 행정시 체제지만 해당 읍면의 행정을 책임감 있게 운영할 현장의 실질적 리더가 부재한 탓에, 도와 시에서 나오는 읍면 관련 정책들은 공허하고 괴리가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거리’의 문제다. 서귀포시의 대정읍에 사는 주민과 성산읍에 사는 주민의 집은 동서로 7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제주 섬 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곳이다. 같은 서귀포시라는 이유로 어느 한 곳에서 시민 단합대회라도 할라치면 다른 한 곳의 주민은 섬에서 가장 먼 거리를 달려가야 한다. 거리가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마음이 멀어지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서귀포 시민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이 멀어질 것이라는 소리다. 같은 행정구역 내의 읍면이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다는 건 행정의 효율성을 고려해봐도 엄청난 낭비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제주시와 서귀포시 외에 두 곳의 구역을 추가할 때, 예전의 남북 제주가 아닌 ‘동서’ 제주를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방금 말한 효율의 문제다. 조천, 구좌, 성산, 표선, 남원을 동제주로 묶고 애월, 한림, 한경, 대정, 안덕을 서제주로 구획한다면, 가장 먼 두 지점간 직선거리는 약 3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군민들의 현안 논의와 단합에 차질을 빚을 만한 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두 번째는 기후와 토질, 그리고 그에 따른 작물의 차별성과 관련된 이유다. ‘대체로’ 제주의 동쪽은 비가 많이 내리고 서쪽은 바람의 속도가 평균적으로 높다. 거기에 토질의 차이가 더해져 동쪽과 서쪽의 농산물 역시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좌’ 당근이 유명하고 ‘대정’ 마늘이 최고 아닌가. 이왕이면 비슷한 기후와 토질을 가진 지역이 하나의 행정단위를 이루는 것이, 기상, 산업과 관련된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훨씬 유리할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아마도 가장 민감한 부분일 수 있는 ‘정서’의 차이다. 동, 서 제주를 반대하는 의견의 핵심은, 각기 개성이 뚜렷한 문화를 보유한 동, 서 제주를 공식적으로 울타리 지으면, 숨어 있던 동, 서의 갈등이 표면화될 것이라는 우려이겠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수많은 외지인과 외지 문화가 유입된 제주는 이제 지킬 것은 지키되, 고유의 문화 위에 긍정적인 것들은 탄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제주 곳곳의 매력을 발견한 도내의 실력자들은 동, 서를 떠난 자기만의 ‘동네’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토질과 기후, 문화의 차이는 오히려 차별화된 ‘멋’을 가진 공간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일 것이다. 동, 서의 색깔 차이는 어우러지고 보완을 거듭하며, 하나뿐인 조화의 섬, 제주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