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배 한 척을 보는 일

그림책 '고릴라'(앤서니 브라운)

by 초연이

아스라한 바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멀리 있어 손에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눈길을 주고 손길을 건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바다가 내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유롭게 보고 만질 수 있는 대단한 권한이 생긴 것처럼 의기양양해집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가늠할 수 없는 양의 바닷물과 넓은 면적과 함께 배 한 척을 덤으로 건네줍니다. 그렇게 배 한 척까지 가진 저는 바다와 배와 하늘과 교감을 하며 마음을 푸르게 물들여 보았습니다.


누군가와 인연이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눈 맞춤을 했다는 뜻일 겁니다. 눈 맞춤이란 꼭 시력을 사용해 상대방의 눈을 보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내 마음과 너의 마음끼리 무언의 인사를 나눴다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정의해보고 싶어요. 그 인연이 어떤 관계가 되었든, 서로 눈을 맞추며 '마음을 알아보아 주는 것'은 참으로 진귀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충분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라는 그림책입니다. 고릴라가 자주 등장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들을 많이 봐왔는데, 이번에는 대놓고 제목도 고릴라이고 표지 그림에도 사람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사람보다도 고릴라의 표정이 훨씬 선명하고 푸근해 보여 의지하고 싶게 만듭니다.



주인공 한나와 아빠 사이에는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신문, 책상, 의자, 그림자, 커튼 등 직선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한나의 마음이 차단되는 것 같아 괜히 가슴이 저며오는 듯해요. 그렇다고 '나쁜' 아빠로 편협하게 몰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바쁜 아빠를 비난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보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한나의 표정과 마음에 초점을 두고 읽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 장면들이었어요.



한나의 생일날, 고릴라를 좋아하는 한나는 고릴라 인형 선물을 받아요. 작디작은 고릴라와 한나가 처음으로 눈을 맞춥니다. 우리에 갇힌 듯, 침대 프레임 속에 그려진 한나와 작은 고릴라는 답답해 보이기도 하면서도, 혼자가 아닌 둘이어서 다행인 것 같아 보입니다. 넓은 세상 속 작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일말의 평온함은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밤새 크게 변한 고릴라 인형은 한나 아빠의 옷을 입었습니다. 한나의 뒤에 빈 껍데기처럼 걸려있는 검정코트와는 다르게, 고릴라가 입은 베이지색 코트가 참으로 따스해 보입니다. 그렇게 따스함과 온기를 '눈 맞춤'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온전히 바라봐주는 시선 하나로 온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 보였어요.



서로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춤을 춥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으로 밥을 먹고, 키가 크고 힘이 센 고릴라는 자신의 발 위에 한나를 사뿐히 올려줍니다. 한나의 표정이 계속 보이진 않지만 알 것도 같습니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한나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보다 독자 마음대로 상상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 것 같아 훨훨 날아갈 듯 그저 자유롭습니다. 고릴라, 한나, 독자 모두가 합을 맞춰가는 듯 안락해진 마음에 저 또한 달밤의 야식과 댄스를 편히 즐겨보았어요.



다시 인형 크기로 작아진 고릴라와 한나는 마주 보며 잠이 들었습니다. 둘 다 눈을 감고 있는데, 온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비록 옆모습이지만, 처음으로 한나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한참이고 들여다보았어요. 엷게 띈 미소와 그 덕분에 봉긋 올라온 볼과 코까지, 마음이 한없이 올라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한나가 함께 등장하며 이야기가 끝납니다. 아빠의 바지주머니에 꽂혀있는 바나나와 한나가 바라보는 고릴라의 사진, 한나와 고릴라사진을 함께 바라봐주고 있는 아빠의 시선, 그리고 아빠와 한나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고릴라 인형. 얼어있던 물이 녹아 졸졸졸 소리를 내며 어느 한 방향으로 함께 가지런히 흘러가던 계곡의 맑은 물처럼, 한 공간에 있는 존재들 사이로 온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얼게 될 일도, 막힐 일도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한나가 그려낸 그림 작품이 당당하게 걸려있었습니다.






넓은 바다에 떠 있던 배 한 척.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는데 이것을 '정이 든다'라고 표현해 보고 싶어 집니다. 배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마음이 조금은 닿았을까요. 바쁜 하루의 파도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떠밀려가고, 누구나 한 번쯤은 '나중에'를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 주는 순간이 있다면, 그 짧은 눈 맞춤 하나가 신기하게도 마음의 좌표를 다시 찍어주는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는 여기야, 그러니까 이제는 이 길로 가면 돼.'라고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말이 길지 않아도, 시선이 길지 않아도, 작은 한 순간이 참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배가 표류하지 않게, 그저 항해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일 수 있게, 시선을 건네봅니다. 각자 저마다 간직하고 있었을 어린 마음들을 키워나갈 수 있게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가 되어 봅니다. 수십 번 수백 번 들어도 아깝지 않은 말,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은 결국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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