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노란 버스'(로렌 롱)
벽의 한편에 저마다 고향이 다를 것 같은 소품들이 모여 한데 걸려 있었습니다. 공통점이라곤 특별히 없어 보이는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꽤 그럴싸했습니다. 여러 각도와 위치로 배치했으나, 또 전체의 모습은 하나의 좋은 그림이 된 듯한 마법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하나하나,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지 모르는 물건들이, 이상하리만큼 공간을 함께, 또렷하게 메우고 있었습니다.
색깔도 모양도 다른 물건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벽"을 나눠 가진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서로를 반짝이게 했고, 하나라도 없으면 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살짝이 햇살을 머금은 벽 한편이, 약간의 그림자를 품고서 조용히 균형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채운 빈틈들이 오히려 숨구멍처럼 느껴져, 그 공간에 존재 함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로렌 롱의 '노란 버스'라는 그림책입니다. 흑백 마을 사이로 도드라지게 노란 버스가 주인공처럼 길을 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스타일의 버스가 '마치 날 따라와 봐.'라고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아요. 늘 같은 구간을 오가는 버스일지, 항상 새로운 곳을 가는 버스인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로 데려가 줄 수 있겠다는 설렘 하나로 책 속 버스에 탑승해 보았습니다.
구불구불, 굽어진 길들 과 각자의 모양새로 지어진 집들 사이로 노란 버스가 지나갑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많지만, 흑백 속에서 '노란색'은 유난히 환하게 느껴집니다. 이 마을을 주름잡는 느낌도 들고, 유일하게 존재하며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요. 멀리서 조망해 보느라 크기가 작아진 버스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버스는 한 때 어린이들을 태우기도 했다가, 노인들을 태우는 버스로 일을 합니다. 저마다의 웃음소리와 말소리로 가득 채워치고, 그들의 삶이 어느 기간 동안 짙게 베입니다.
그러다 어느 길에 방치가 되었지만 염소들의 집이자 놀이터가 되기도 해요. 사람의 관점에서는 '방치'라고 표현할 수 있겠으나, 버스나 염소의 입장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딘가를 향해 '달린다'는 버스의 기본 역할이 아닌, 정지된 상태로도 나름의 충분한 의미가 생기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사람들과는 또 다른 존재들들로 다가왔을 생명들을 품는 기간이 버스의 인생에서는 어떤 의미였을지, 어렴풋이 가늠해 봅니다.
시간이 흐르고, 버스 주변에는 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항상 '노란 버스는 행복했어요'로 장식되던 페이지가, 처음으로 '노란 버스는 무척 외로웠어요'라는 글귀가 함께 실렸습니다. 소리 없이 물속에 잠긴 버스의 노란빛만이 남아있을 뿐, 이전엔 어떤 삶이 펼쳐졌을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버스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것들,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흔적이 없어진 것에 대한 허무함이었을까요, 늘 행복해만 하던 버스가 외로워한다니, 더욱 그 외로움은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물속에 잠긴 버스는, 저의 허무함이 무색할 정도로, 또 다른 의미를 찾았습니다. 물고기들의 놀이터가 되어, 결코 끝나지 않은 생을 살고 또 살아내고 있었어요. 이제까지 거쳐간 사람들, 염소들과는 달리, 눈길이 버스를 향하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물고기 떼들에게 둘러 싸여 있지만, 비로소 버스에게 온전한 생명이 주어진 듯했습니다.
물속에 잠겨 마을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독자들에게는 노란빛으로 그 존재는 계속되고 있음을 열심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물이 불어나고 마을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열심히 존재해 준 노란 버스가 참 고마웠습니다. 뭔가, '희망' 같았다고 할까요. '이대로도 괜찮아.' 그의 충분한 메시지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습니다.
노란 버스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달리지 못하는 날들이 오고 버려지는 순간이 있어도, 물속에 잠겨도, 버스는 계속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기능이 사라진 것 같아도, 다른 방식으로 의미가 샘솟아 나요. 억지로 세상을 힘겹게 바꾸는 힘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을 천천히 소화해 내 삶의 일부로 만드는 힘.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힘겨움보다, 주변의 것들을 소화해 내는 것이 더 어려우나, 그것을 뛰어넘고 나면 순탄해지는 삶의 진리를 노란 버스 한 대가 절실히 보여준 듯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결국 비슷한 지점에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이렇게 해 주면 좋겠고, 조금만 덜 그러면 좋겠고. 하지만 그 마음이 커질수록 관계는 자주 숨이 막힙니다. 노란 버스가 마을의 개발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내가 바꿀 수 없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부지런히 배우고 되뇌고 연습 중입니다.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정확히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시 배치하는 일. 오늘을 소화해 내 삶으로 만드는 조용한 힘을 기르는 일. 그리고 그 조용한 힘이, 어느 날 같은 벽을 공유한 나와 우리 사이에 충분히 숨 쉴 자리를 만들어 줄 것임을 믿어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