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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아름다움의 여지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버스'(맷 데 라 페냐)

by 초연이


오랜 세월의 흐름이 켜켜이 내려앉은 기와 사이로 이름 모를 식물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밉니다. 멀리 서는 몰랐을 어느 풀에서 흘러나온 곡선이, 낡은 기와의 흐름과 제법 잘 어울립니다. 카멜레온처럼 비슷한 색깔을 띠는 것 같기도 하고, 잎맥의 흐름이 기와의 오래된 흔적 같기도 하면서, 서로 닮아가는 듯 퍽 조화롭습니다.


생명이 자라나기엔 그리 적당해 보이진 않은 단단하고 건조한 회색의 기와 사이에서, 초록의 생명은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괜히 반갑고, 대단하고,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나 환희보단 오히려 '안도'에 가까운 감정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틈에서도 생명이 피어날 수 있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달까요. 어떤 어려움, 위기, 고난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도 스며들었습니다.






초록의 생명을 보며 떠오른 그림책이 있었습니다. 맷 데 라 페냐의 '행복을 나르는 버스'입니다. 버스라는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루틴을 살아가기도 하고, 종종 새로운 사람들과 아주 잠시 공존하는 곳이죠. 옷깃을 스친 건 아니지만, 같은 시간대에 버스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머무르면서, 비슷한 방향 또는 같은 종착지를 가지고 이동하는 인연도 예사롭진 않습니다. 인연을 맺었다고도, 맺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어떤 행복을, 어떻게 나르고 있었을지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첫 장을 넘겨보았던 책이었어요.



비가 오는 날, 주인공 '시제이'와 할머니는 버스를 타러 갑니다.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독자인 저도 함께 그 버스에 올라탔어요. 아쉽고, 불편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던 시제이. 그 아이의 눈에 들에 들어온 세상은, 삐걱거리고, 불완전하고, 왜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투덜대고 싶게 만들 만큼 서툴고 부족해요. 세상의 모난 부분이 자꾸만 도드라집니다.



그런 시제이의 말에 대답하는 할머니의 말은 그 자체로 선물이고, 햇살 같았어요. 시제이의 부정에 긍정을 억지로 덮는 방식이 아닌, 아이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조용히 틈을 만들어주던 말. 그 틈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시제이가 보는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합니다. 눈과 마음이 분명히 넓어지게 하는 말들이 그저 푸근하고 따사로워서 오래오래 담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단다. 늘 무심코 지나치다 보니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



무지개가 둥실 떠올랐습니다. 시제이의 마음속에 스며든 할머니의 온기 덕분에 시제이 마음에도 무지개가 떠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제이는 처음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표현합니다. 흐린 하늘을 가뿐하고도 청아하게 장식하는 무지개의 위엄은 묵직하고 경이로워요.


할머니, 여기 오니까 좋아요.


'여기'가 어딘지는 아직 그림만으론 추측하기 어려웠어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줄 지어 서 있는데, 마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공공장소인 것 같아요. 이 공간의 어떤 냄새와 어떤 공기에 시제이는 좋다고 했는지,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진한 여운에 다시 돌아와 곰곰이 느껴본 장면이었어요.



할머니와 시제이는 급식소로 보이는 곳에서 배식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껏 세상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려 했던 할머니는 웃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하던 할머니가 웃지 않은 이유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 없이 책이 끝나버리는 바람에, 깊은 생각에 빠져봅니다. 온갖 상념과 허망함, 무료함, 혹은 저마다의 희망과 의욕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내 보려는 안간힘에 대한 과묵한 응원이었을까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만이 판단할 수 있는 진지한 무게감을 조심스레 가늠해 보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온기를 건네는 일. 그 온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움직이는 것. 꾸밈없고 담백한 할머니의 말과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에도 조용한 안도를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안도감은 삶이 완벽해졌을 때 오는 감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모난 부분을 그대로 두고, '그래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생겨납니다. 못해낼 것만 같았던 일들,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마음의 문들. 누구의 힘이었는지 그것들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내 몸에 딱 맞는 소파에 몸을 누인 듯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거나 위로 붕 뜨는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기와 사이로 빼꼼 자라난 생명 한 줄기, 사실은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 빛나고 있던 소소한 일상들, 할머니와 시제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건넨 따스한 음식들. 개운하게 내려앉은 퍼즐들이 탁탁 맞춰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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