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 두 잔 사이의 약속

그림책 '싸워도 우리는 친구'(이자벨 카리에)

by 초연이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진 따뜻한 커피잔 두 개. 잔과 잔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거리고, 김이 올라오는 방향은 마치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누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일단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자리를 마련해 둔 다정한 느낌. 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서 잠시라도 공유할 그 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따사롭습니다. 우리, 여전히, 언제나, 함께 있어, 와 같은 메시지가 공기의 흐름을 타고 오갑니다.


관계의 시작은 의외로 쉽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취향을 공유하고, 한 번 웃으면 다음 약속과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길고 깊은 관계는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서 생각보다 많이 흔들립니다. 서로의 좋은 면은 금방 익숙해지고, 불편한 면은 늦게라도 결국 수면 위로 동동 떠오릅니다. 나의 피로가 상대의 말투에 묻어 나오고, 상대의 하루가 내 마음의 여유를 건드릴 때, 친밀함은 종종 날을 세우곤 합니다.






이자벨 카리에의 그림책 '싸워도 우리는 친구'입니다. 같은 한 배를 탄 두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해맑습니다. 하지만 배에서 곧 뒤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기도 한, 아이러니한 그림이 책장을 넘겨보게 합니다. 분명 서로를 향해 웃음을 보내고 있는데, 그들이 함께 탄 배는 살짝 흔들리고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이면 속에 숨어 있을 그 흔들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해답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치솟습니다.



'마음이 잘 통한다'는 이유로 금방 친해졌고, 친해짐에서 오는 행복한 감정이 영원할 줄만 알았지만, 금방 지루해지고 말아요. 아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웃고 있지만, 배에서는 '삐거덕'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삐거덕 소리를 감지하는 일은 평화주의자인 저에겐 상당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서로에게 비슷한 크기의 의지만 있다면 이 슬픈 일도 이겨낼 만한 용기를 갖게 하곤 하죠.



둘 사이에선 작고도 어렵게 얽힌 작은 검정 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툼이 있는 관계가 그저 나쁜 관계라는 단정 대신, '싸울 수도 있는 사이'라는 역설적인 친밀함을 꺼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싸움이 없느냐가 아니라, 싸움 이후에 무엇을 하느냐인 듯합니다. 서로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어떻게 손을 다시 내밀 것인지, 그 작은 검정 덩어리가 결국은 커지다가 작아질 것임을 믿는 마음 같은 것들.



갈등은 대부분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쌓인 말 한마디, 서로에 대한 작은 방치, 서로의 기대가 살짝 어긋난 순간에 생기는 얇은 상처. 상대가 나를 말없이도 이해해 주길 바랐는데, 내 마음은 설명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리던 순간. 그러다 어느 날,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봇물이 터져버립니다. 누가 맞는지, 누가 더 서운한지, 누가 먼저 사과해야 할 일인지를 자꾸만 판결하려고만 해요.



하지만 관계를 오래 가져가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게 뭐지?". 이 질문은 승패를 잠시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선택을 하게 합니다. 먼저 사과하고, 말투를 낮추고, 오해를 확인하기, 그리고 내 말이 상대를 다치게 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기, 상대의 말 뒤에 숨은 피로를 상상해 보기.



우리는 싸울 때 대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하고,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부족한 내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래 유지되는 관계는 그럴수록 다시 앉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에요. 사과는 자존심을 지나가야 하고, 대화는 감정을 정돈해야 하고, 화해는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화해는 늘 시간이 걸리고 내 마음이 상하는 듯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도 함께 가만가만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마음'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마음은 출발점이고, 유지에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아요. 불편한 주제를 피하지 않는 용기, 한 번 더 묻는 습관, 상대의 방식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번역해 보는 성의. 때로는 잠시 거리를 두는 선택도,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 되기도 하죠. 중요한 건 관계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정성껏 '돌보는 태도' 같습니다.






커피 두 잔은 서로의 온도를 빼앗지 않습니다. 각자의 잔을 지키면서도, 같은 테이블에 함께 머뭅니다. 저는 그 장면이 '우리는 결국 다시 이야기할 거야'라는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고도, '서로 함께' 오래도록 남겠다는 선언. 어쩌면 관계의 깊이는 다정한 순간의 총합이 아니라, 불편한 순간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로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워도 우리는 친구. 그 문장을 믿기 위해 오늘도 마음속에 작은 테이블을 하나 펼쳐봅니다. 그리고 커피잔 두 개를 조용히 올려줘요. 말이 모자라면 김으로, 손이 떨리면 온도로. 결국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의지 하나만은 놓치지 않기 위해서. 관계는 기적처럼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소한 선택들로도 충분히 유지됩니다. 두 잔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다시 나란해지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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