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은 집 이야기'(버지니아 리 버튼)
빛바랜 거울 앞에 섰습니다. 다른 사물을 비춰주는 거울의 기능은 여전히 잘하고 있지만, 거울을 감싸는 테두리만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거울. 그리고 그 거울 옆에 붙어 있던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때아닌 변명 같기도 하면서,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진가를 인정받고 싶은 아우성 같았던 문구. 힘을 다해 남아있던 빛을 내고 있었던 거울의 테두리가 애처로워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끈에 묶인 것 같았어요.
거울의 주인이 만인을 위해 기증을 한 것인지, 그 소유권을 정확하게 정해주기 전에 주인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한 거울의 생애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바라보고 서 있는 누군가에 의해 거울이 힘을 낼 수 있다면, 말없는 거울이 전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거울이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저 좋겠다 싶었습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라는 그림책입니다. 초판 발행일은 1993년 11월 5일. 30년도 넘은 이 그림책을 우연히 마주해 보면서 역사적인 인연 같다는, 이상하리만치 광활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느 그림책과 한낱 평범한 독자와의 평범한 만남이었지만, 30년이란 생략된 역사를 뒤로하고, 따끈한 느낌으로 책을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빳빳한 책 표지 한 장을 사뿐하면서도 경건히 넘겼습니다. 2020년에 제45쇄 개정판으로 발행되었지만, 여전히 최초의 삽화는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책 제목에서부터 '작은 집'이 주인공임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주인공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우직한 작은 집 앞으로 말이 지나가더니 어느새 작은 집 주변으론 건물이 들어서고 자동차가 쌩쌩 달립니다. 붉은색의 작은 집도 어느새 옅은 분홍색이 되었습니다.
작은 집은 원래 들판 한가운데에서 사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하던 존재였습니다. 창문은 두 눈처럼 반짝였고, 문은 단정한 코 같았으며, 문 아래 디딤돌은 빙그레 웃는 입처럼 보였습니다. 빨래가 널리고 저녁밥 냄새가 스며들고, 그 냄새가 집의 벽지와 공기를 바꾸는 일들. 어떤 생명이 숨을 쉬고 자라고 늙어가듯, 작은 집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집의 위치와 모양, 표정은 그대로인데, 완연한 사계절이 오롯이 느껴지는 풍경이 참으로 정겨웠습니다. 어렸을 때 가던 할머니댁도 생각이 나면서 저 또한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느낌과 감성 속에서 부지런히 크고 있었을 저의 어린 모습과 만나는 듯하며 괜스레 먹먹해진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장면들이었어요.
사계절을 품어내던 작은 집 주변은 언젠가부터, 쉼 없이 변화를 마주합니다. 새로운 길이 뚫리고, 건물은 높아지고 사람들의 걸음은 빨라져요. 불빛은 밤을 환하게 바꾸고, 소음은 새소리를 밀어냅니다. 인간이 선물하고 만들어낸 편리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자신의 속도를 잃었습니다. 작은 집이 못나서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바뀌면서 낡고 불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동안, 자주 우울해 보이던 작은 집은 창문이 깨지고 색도 많이 바래 버렸습니다. 깨진 창문은 눈물을 흘리는 눈 같아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이 장면은 묘하게 어른의 시간과 닮아있는 듯합니다. 처음엔 사랑, 설렘,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관계나 일상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내 탓, 남 탓, 환경 탓, 누구 탓을 해야 할지 몰라 서글픔 주변을 전전합니다. 하지만 작은 집은 그저 한 자리에서 너무 많은 변화를 떠안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울의 테두리처럼요.
다행히 작은 집 이야기의 끝은 소멸, 폐기, 도태와 같은 것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작은 집은 다시 자신에게 맞는 곳으로 옮겨지고, 정돈이 되고,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작은 집은 다시 '웃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결말이 좋아 작은 집의 모습과 그 주변에 드리워진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작은 집이 다시 자신의 본질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품어내는 집, 누군가를 비춰주던 거울. 세월이 흐르고 빛이 바래도, 그 본질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만났던 거울의 옆 문장이 더 이상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집이 우리에게 보내는 작고도 큰 메시지 같았습니다.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망가진 게 아니라, 그저 시간을 지나온 거예요, 쓸모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역할을 해 온 거예요, 남은 흔적은 결함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역사이자 이야기예요,라고 열심히 외치는 듯했습니다.
스스로가 낡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관계가 낡았다고 느껴지는 날도 있고요. 그럴 때 저는 거울을 떠올려 보려고 합니다. 테두리는 바랬지만 비추는 면은 여전히 정직했던 거울. 바랜 테두리 마저 그 정직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던 그 순간. 그리고 작은 집으로 생각의 흐름을 살짝 옮겨봅니다. 우여곡절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을 품을 준비는 계속되던 시간들. 우리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은, 새로움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이야기들, 그 오래된 흔적들 속에도 충분히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더 자주 말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변색된 것이지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낡은 것은 곧 우리의 서사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그리고 본질은 여전히, 살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