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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Aug 30. 2019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6)남원 뒷밤재~운봉초교

남원시 뒷밤재~운봉초등학교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⑥ 남원 뒷밤재~운봉초등학교

[2019/08/20]      


  

[여원재. 24번 국도 상에 있는 고갯마루인 이곳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통영별로 상의 고개이기도 한 이곳은 우리 역사의 타임캡슐 같은 곳이다. 고개를 잇는 산줄기에서 이백 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섬진강, 운봉 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낙동강의 수계를 이룬다.]    



4월 25일 비 올 징후가 많았다. 아침 식사 후에 길에 올라 운봉(雲峰) 박산취(朴山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몹시 퍼부어 머리를 내놓을 수 없었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이미 순천으로 향했다고 하기에, 즉시 사람을 금부도사(이사빈)에게 보내어 머물러 있게 했다. 이 고을의 현감(남간南侃)은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남원을 지나갈 무렵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유재란의 전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다. 먼저 군량 확보를 위하여 3월 중순 전라도로 파견된 호조판서 김수가 남원의 곡식창고를 점검하고 봉인하였다는 난중잡록 4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5월 초,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장수 양원이 임금 선조에게 ‘가장 긴요한 방어 지역’이 어디냐고 묻자, 선조는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원이 요해처이니 이곳의 방어를 부탁한다’라고 답하며, ‘김수는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조처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선조실록 기사이다.            

     

이렇듯 정유재란 발발조짐이 있자 조선 조정은 당초부터 왜군의 호남 공략을 대비해 남원 방어를 최우선 방책으로 삼았고, 구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이곳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을 남원의 상황에 대해서 일절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있다.      


[

[남원 뒷밤재. 남원에는 밤재(栗峙)가 두 군데 있는데, 이곳은 남원부의 뒤(북쪽)에 있다하여 오래전부터 뒷밤재로 불리어 왔다. 이날 서울에서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남원구간 답사를 위해 내려온 (사)한국체육진흥회 회원들과 함께 답사를 시작하였다.]    


8월 초순이 끝날 무렵 남원시 뒷밤재로 들어섰다.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이지만 대기는 이미 달구어져 있고, 배롱나무도 더욱 붉게 꽃을 피웠다. 이번 답사는 뒷밤재에서 남원시가지와 여원재 옛길을 거쳐 운봉초등학교에 이르는 약 24km 구간을 걷게 된다.     

            

뒷밤재에서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가로수를 이루는 길을 천천히 내려서면 백의종군로는 옛 서남대 앞에서 춘향로(17번국도)와 만난다. 이곳에는 도로 오른쪽으로 인도가 잘 조성되어 있다. 폴리텍대학 버스정류소에 이르면 정류소 뒤의 오솔길로 길이 이어진다. 예전 전라선 철길이 지나가던 곳인데, 뜻밖에 ‘사람의 길’로 기능하게 되었다. 향교동으로 이어지는 ‘만인로’에서는 옛KBS방송국 고갯마루까지 약 700m를 갓길이 없는 이차선 도로로 걸어야 하니 운행에 주의를 요한다.     

            

고개를 내려서면 이내 남원향교를 지나 축천교를 건너게 된다. 남원부 북문(옛남원역)으로 들어서던 옛길은 아파트 단지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고 하나, 옛길의 흔적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길은 ‘향교오거리’에서 옛남원역을 잇는 ‘대체로’로 복원이 되어있다. 전라선 남원역을 도심 외곽으로 이전하며 폐역된 옛남원역은 예전 남원성 북문이 있던 곳으로, 현재 문화재청의 유물유적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남원성은 정유재란기인 1597년 8월 16일, 만여 명의 인명이 처절하게 숨져간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만여 명의 시신을 합장한 ‘만인의총’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남원향교 진강루. 하마비 위에 2층을 이루며 서있는 진강루는 일제강점기 때 남원 동헌의 문루이던 환월루가 헐릴 위기에 처하자 남원 유지들의 의연금을 모아 사들여 분해 및 재조립 과정을 거쳐 세워진 건물로 당시 남원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감이 잘 느껴진다.]


백의종군로는 옛남원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법원사거리(남원지원)로 이어지며, 이곳에서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외버스터미널-동림사거리를 차례로 지난다. 이곳의 도로명은 용성로인데, 남원의 오래된 역사가 서려 있는 길이다. 용성(龍城)은 남원의 옛이름이다. 동림사거리에서는 복잡한 도심 구간을 피하고 아름다운 요천을 보며 걸을 수 있도록 요천변 동림교 앞으로 길을 이어놓았다. 요천은 장수에서 발원하여 남원의 젖줄을 이루며 흐르다가 곡성에서 섬진강 본류와 만나는데, 지리산을 포함한 헌걸찬 백두대간 산자락의 물길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동림교에서 요천로를 따라 2km 남짓 진행하면 월락삼거리가 나온다. 백의종군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백로로 들어선다. 도로를 따라 이백면사무소까지 약 5Km를 불볕더위와 맞서며 걸어야 한다. 이백면사무소에서 이백초등학교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목가리 마을회관에 도착한다. 목가리(木街里)는 현재 무척 한적한 마을이나, 24번 국도가 주 도로로 기능하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원재를 거쳐 남원과 운봉-함양을 오고가던 길목으로, 주막과 양조장이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목가리마을 정자

     

약 3km에 이르는 여원재 옛길에는 작고 예쁜 계곡과 멋진 숲길, 그리고 역사성이 뛰어난 옛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양가저수지에 이르면 ‘여원재 옛길’이 시작된다. 오래전, 가시나무와 넝쿨로 밀림을 이루던 이 길의 복원을 추진하며, ‘사람들은 길을 버렸고, 길을 스스로 몸을 감추어버렸다’라며 곳곳에 파발을 띄우던 기억이 새롭다.        

  

       

여원재 옛길에 있는 계곡

길은 저수지 왼쪽으로 진행하여 오른쪽 갈대밭 사이로 난 길로 이어진다. 산허리를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서면 이제부터 한동안 너르고 반듯한 오솔길을 걷게 된다. 키 큰 소나무 숲 옆의 삼거리에서는 정면 갈대밭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서 계곡을 건넌다. 철조망과 무덤 있는 곳을 지나니 이내 휴식하기 좋은 숲속의 넓은 공간을 만난다. 쉼터 옆의 예쁜 계곡에서 오늘 폭염 속의 고행을 충분히 위로받는 듯하다.     


유정과차 각석. 임진왜란기에 구원병으로 출정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1593년(계사년) 5월, 1594년(갑오년) 3월에 지나갔다는 내용을 거대한 바위에 새겨놓았다.


유정부과 각석. 임진왜란기에 구원병으로 출정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1593년(계사년) 5월, 1594년(갑오년) 3월에 지나갔다는 내용을 거대한 바위에 새겨놓았다.


숲길을 잠시 오르면 오래된 글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바위를 차례로 만난다. 이른바 유정과차(劉綎過此), 유정부과(劉綎復過) 각석(刻石)이다. 각각 1593년(계사년) 5월, 1594년(갑오년) 3월, 임진왜란기에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장수 유정이 지나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곧이어 ‘나주임씨삼세충의비’와 ‘여원치마애불상’을 차례로 지나니, 24번 국도로 올라서며 백두대간 고개 여원재에 닿게 된다. 백의종군로는 24번국도(황산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한국경마축산고 앞의 마산교를 지나 왼쪽 과수원 농로로 이어지며 서림공원을 지난다.           

      

옛길은 24번 국도변 ‘향돈촌’ 있는 곳으로 곧장 이어졌다고 한다. 예전 운봉 객사가 있었던 운봉초등학교에서 폭염 속의 답사를 마친다. 7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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