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에필로그
태국행 항공권 예약 완료. 4월 넷째 주엔 원대조 선생님과 나의 휴가로 확정되었다. 아니, 원대조 선생님과 함께 간다는 게 아니고, 휴가 기간이 겹쳤다는 뜻이다. 원대조 선생님도 같이 수험 공부하고 같이 합격한 여자 친구가 있다. 직장인이 되면 무조건 여름휴가는 해외여행이다라고 꿈꿔 왔기에 휴가 확정되자마자 항공권부터 샀다. 알고 보니 우린 7, 8월의 여름휴가는 거의 못 간다고 봐야 한다고 한다. 7, 8월이 반기검토[1] 시즌이기 때문이다. 김장수 선생님은 진작부터 휴가 계획을 짰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도 뒤늦게 2주 후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계획도, 준비도 없이 일단 샀다.
4월 셋째 주, 나독립 선생님이 휴가 후 복귀하셨고, 이번엔 차례로 노대차 선생님과 김장수 선생님이 휴가를 떠났다. 다음 주는 내 차례.
“나독립 선생님, 노대차 선생님이 그러던데 1년 차 때 선생님하고 같이 전라도 어디 지방 출장 가셨는데 거기 회사에서 점심 먹으러 간 곳이 토끼탕 파는 데였다는데 진짜예요?”
나는 일주일 만에 출근한 나독립 선생님에게 휴가 후기를 묻기도 전에 물었다.
“네, 진짜예요. 간판도 없이 산기슭에 있던 작은 집이었는데 툇마루에 앉아서 닭볶음탕인 줄 알고 먹고 있는데 앞에 앉은 과장님이 그거 토끼라고 하대요. 장난하는 줄 알고 웃어넘기고 주위를 둘러보니 대청마루까지 꽉 찬 손님들 다 똑같은 메뉴를 먹고 있더라구요. 아직도 미스터립니다. 그때 우리가 먹은 게 토끼인지 닭인지.”
나는 이 부분을 진로의 날 강의자료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중학생들에게 낭만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장점과 단점을 사실 그대로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 수위를 두고 갈등 중이었다.
다음 날 떨리는 마음으로 혹시 중2병에 걸렸을지 모를 중학생들을 만나러 갔다. 교실 문마다 몇 학년 몇 반이라고 쓰여있는 팻말 위에 직업명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붙여진 교실 안에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경찰도 있었고, 연극인도 있었다. 제법 직업군을 다양하게 갖췄다. ‘회계사’ 교실에는 무척 차분해 보이는 아이들과 무척 관심 없어 보이는 아이들 열댓 명이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탐구를 희망하는 직업을 고르도록 했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딱 절반은 단짝을 따라왔지 싶었다. 그다지 관심이 많아 보이지 않는 눈빛들을 보고 너무 심각해지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피티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먼저 던졌다.
“회계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미 알고 온 친구 있어요? 한 번 손 들어볼까요?”
없다. 그리고 넘긴 슬라이드에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영화 포스터가 나타났다. 생각해보니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하나 떠올랐고, 회계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 해도 (우리 엄마조차도 내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인’ 하면 저절로 ‘중개사’가 따라 나오곤 한다.)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다고 생각해서 삽입한 이미지였다.
“이 영화 본 친구 있나요?”
없다. 나는 계속하여 관심을 끌기 위해 말했다.
“회계사는 회계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나만 웃었다. 하긴 나도 나독립 선생님이 외칠 때마다 썰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이제 이 일에 호감을 갖게 하거나 단순한 호기심이라도 갖게 하자는 욕심은 버리자. 그저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알려만 주자는 목표로 선회하자 담담해졌다. 이어서 나는 나의 책상 사진을 띄우며 회계사는 노트북은 말할 것도 없고, 계산기와 하나다라고 말하니 나의 옛 수험시절이 떠올랐다. 사실 그 시절 계산기는 더 중요했다. 유명 중급회계 강사가 우리의 준비물은 항상 ‘쌀집 계산기’ 뿐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시작했지만 공학용 계산기를 썼다간 시험 볼 때 다 틀린다며 합격의 길은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건 필수라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는 내가 처음 가졌던, 동네 문방구에서 만 원에 산 그 크고 단순 기능만 있는 계산기를 당당하게 들고 다녔다. 그러다 회계사 시험을 목표로 하는 친구들을 하나 둘 사귀기 시작했는데 모두 같은 계산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Casio JS-40B. 터치감도 좋고, 내구성이 강해 시험을 치르는 도중에 고장 날 일이 전혀 없다고 들었다. 무엇보다도 미친 듯이 눌러도 소리가 많이 나지 않아 중앙 도서관에서 공부해도 주변에서 핀잔 들을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에게서 용산 전자상가에서 샀다는 얘기를 듣고 그 길로 달려가 나도 하나 장만했다. 비로소 진짜 수험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후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 관심 없는 친구들에게 내 책상 사진 속의 그 계산기에 대해 이렇게 다 자세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나의 하루’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나의 하루를 설명하며 앞자리에 앉은 친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친구의 두 눈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단 한 명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갑자기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회계사가 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그날의 특강을 마쳤다. 휴 이제 끝났다. 그 동안 이 학생들 앞에 섰던 원대조 선생님과 노대차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심의구 이사님은 여전히 감사 계약 건으로 바빠 보였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디엔에이 때문이었는데, 우리는 한 달 전 결국 계속 기업 가정 타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의견거절을 표명하였고, 그 결과로 디엔에이의 주식이 거래 중지되었다. 그 후로 날마다 디엔에이는 사업 계획 및 진행 상황 관련 공시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바이오 신사업에 대한 기술 특허권을 취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래소에서 이 모든 것들을 심의하여 상장 폐지 여부를 결정하겠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계속 기업 불확실에 대한 감사인의 판단에 저항하는 투자자들이 주식 거래 정지로 인한 손해를 감사인에게 물을 수 있는 집단 소송을 심의구 이사님은 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의구 이사님은 어쩌면 재감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심각해져서는 말했었다. 디엔에이로부터 재감사 요구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휴가 일정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항공권을 취소했다. 휴가를 안 간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짬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분위기를 두고 갈 수는 없지.
재감사와 집단 소송에 대한 불확실성은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거래소의 기업심사위원회에서의 심의가 종결되지 않아 속개되기를 몇 차례. 결국 상장폐지 사유 해소로 거래정지가 해제되었다. 그러나 거래정지가 해제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주포[2]와 그 일당과 함께 디엔에이의 대표가 주가 조작으로 검찰에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음… 회계사의 삶은 이렇게 살 떨리는 현장 속에 놓여 있는 거구나.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불확실성 투성이구나. 아니 어쩌면 다른 직장인의 삶도 똑같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생 자체가 그런 걸지도 모른다.
심의구 이사님은 주식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에 대해 날마다 잔소리를 해대고 있다.
“기똥차 샘, 주식 계좌 개설했나? 니 꼭 해보래이. 주식 투자해봐야 투자자 심리도 알게 되고, 기업 정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무엇보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길거대이. 꼭 내 돈 넣어 직접 투자해봐야 관심 갖고 적극적으로 알게 된대이. 주식으로 돈 벌라는 게 아니라 기업 생태를 알란 말이다.”
로이시스템 대표님이 어떤 회사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며 그 회사의 주식 평가를 의뢰하기 위해 심의구 이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그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투자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의구 이사님은 공인회계사법상의 직무제한을 이유로 감사대상 회사의 주식 매수를 위한 가치 평가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다른 회계법인을 소개해 주었다. 대신 다른 용역이 그 자리를 매웠다. K-IFRS[3] 구축 용역이 그것이었다. 반기 검토 시즌 전후로 바빠질 예정이다. 그리고 반기 검토 시즌이 시작되었다. 나독립 선생님, 이번엔 뭐라 외치시려나?
[1] 비상장 외감 법인은 일반적으로 중간감사와 기말감사, 이렇게 2차례 감사 필드에 나가지만 상장 법인은 규모에 따라 분기 검토, 반기 검토, 중간감사, 기말감사 이렇게 4차례 감사 필드에 나가게 되므로 대기업 감사와 같이 감사 투입 시간이 많은 경우에는 아예 감사 대상 회사에 상주하는 감사인이 있는 경우도 많다.
[2] 주가를 조정하려고 하는 세력의 지휘자를 말한다.
[3]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을 말한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는 처음으로 전 세계 회계기준의 표준을 2007년에 제정하여 발표하였으며, 각국은 그 국제회계기준의 도입 여부와 채택 범위를 결정하였고, 한국은 국제회계기준을 전부 채택하면서 다른 항목을 추가하여 적용하기로 하고 2011년 그 적용을 의무화하였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