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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란 Jun 03. 2021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삶 <미몽>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입니다! <차이나는무비 플러스>는 <길 위의 인문학> 시리즈로 한중일 영화 속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 영화, 양주남 감독의 1936년 작 <미몽>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영화 <미몽> 발굴 공개전 당시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제목 ‘미몽’은 미혹할 미(迷), 꿈 몽(夢)을 써서 ‘꿈에 홀리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영화 내용과 함께 생각해본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이나 ‘헛된 꿈’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죠. ‘죽음의 자장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전체 제목은 영어로 ‘sweet dream’으로 옮겨졌습니다. <미몽>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성 극영화인 만큼 오늘은 먼저 한국 영화사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한국 영화사 최초의 영화는 1919년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때 어떤 영화가 최초의 영화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죠. 대체로 많은 학자들은 <의리적구토>(義理的仇討) 또는 <의리적구투>(義理的仇鬪)가 영화가 최초의 영화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당시 종로 3가에 위치했던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연극을 하는 중간에 무대 위 스크린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연쇄극’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온전한 영화라고 볼 수 없다고 하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필름으로 촬영되었기에 영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일보 등의 신문 기사를 참조하면 같은 날 <경성전시의경>(京城全市─景)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리적구토>가 최초의 영화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한국 영화의 출발은 1919년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이 시점은 중국이나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도 조금 늦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일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조금 뒤늦게 영화라는 장르가 출발한 것이겠죠.



영화 <애국혼>(1928), <안녕, 상하이>(1934) 포스터 (출처: EBS다큐멘터리 캡쳐, 바이두 백과사전)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더욱 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이 역시도 식민지 시기라는 한계로 자유롭게 영화 창작을 할 수 없자 당시 민족의 이야기나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영화인들은 중국 상하이로 향하게 됩니다. 정기탁, 전창근, 이경손, 정일손, 한창섭 등이 대표적인 ‘상하이파 영화인’ 입니다. 특히 정기탁 감독은 1928년 안중군 의사를 다룬 영화 <애국혼>을 제작하였고, 1934년에 제작한 영화 <안녕, 상하이>는 당시 최고 스타였던 란링위(阮玲玉)가 주연을 맞아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상하이파 영화인’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영화사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계속 영화를 만든 이들도 있는데 <미몽>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미몽>은 가장 오래된 발성 영화인만큼 영화의 발굴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1920년 당시에는 필름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제작된 영화들의 필름은 방치되었고 현재까지도 찾지 못한 영화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에 들어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을 포함한 옛 한국 영화들을 찾기 위해 일본과 중국의 영화 자료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중국에서 인쇄물이 발견되고 중국전영자료관의 협조를 통해 복사한 뒤 한국영상자료원에 입고된 것이죠. 당시 <미몽>을 포함해 총 7편의 귀중한 자료를 발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발굴에는 당시 상하이 뿐만 아니라 장충 역시 또다른 영화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이듬해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때 일제는 전쟁을 위한 선전수단으로 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영화는 전쟁에 대한 자국민들의 여론을 긍정적으로 조작하는 선전의 효과를 낼 수 있고 동시에 전쟁 물자를 대비할 자금을 마련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게 영화는 전쟁을 계속해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죠. 일제 역시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영화제작소를 만들어 상당한 만주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영화 제작에는 현지에 있던 중국인들, 일본인들, 또 조선인들까지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춘의 영화제작소는 1949년,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면서 베이징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상하이, 장춘 등지에 있던 영상 기록들이 모두 베이징에서 통일적으로 관리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함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 발굴된 <미몽> 영화를 보면 영상 크레딧에 ‘장춘 영화 재편찬’, ‘중국영상자료원이 수장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삽입된 것이죠. 이렇게 이전, 보존된 필름이 2000년도 초반에 한국영상자료원의 노력으로 디지털화해 대중에게 공개된 것입니다. 



영화 <미몽> 스틸컷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공식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캡쳐)


<미몽>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자유 분방한 애순(문예봉 분)이 자신을 속박하는 남편을 못 견뎌 다른 남자와 만나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부잣집 남자처럼 보였지만 알고보니 사기꾼이었고, 애순은 그를 떠나 새로운 남자를 찾게 되죠. 이후 극단의 무용수(조태원 분)와 사랑에 빠지고 애순은 그가 탄 기차를 따라가기 위해 택시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택시가 과속을 하며 길을 건너던 자신의 딸 정이가 치게 됩니다. 병원에 간 딸은 깨어났지만 애순은 넋이 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와 짜임새는 조금 단순하지만 연출 방식만큼은 모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영화입니다. 또한 1930년대 서울 전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재미도 있죠. 영화는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와 공식 유튜브에서 감상하실 수 있으니 꼭 한번 사이트에 들어가서 <미몽>과 한국 고전 영화들을 찾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디지털 복원에도 음향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시청하실 때는 한국어 자막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차이나는 무비 플러스>의 킬러 콘텐츠!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말그대로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영화 속에서 살리고 싶은 캐릭터와 이야기, 장면들(TO BE)은 살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NOT TO BE)은 다시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영화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더해 색다르게 상상해보는 ‘리(Re)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는 무비 플러스> 멤버들은 한국 최고(最古)의 발성 영화 <미몽>에는 어떤 TO BE와 NOT TO BE를 선정했을까요?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아 잠도 많은 '꿈꾸미'는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과 함께 유의미한 장면과 장치를 TO BE로 선정했습니다. 바로 영화 속 감독의 연출이 빛난 ‘거울’ 장면입니다. 먼저 꿈꾸미는 영화가 세계관을 세 층위로 나누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첫번째는 가정을 지키려 노력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즉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가장으로서의 남성과 그 질서로부터 일탈을 추구하는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의 일탈의 결과로 만나게 되는 또다른 세계의 남성들인 사기꾼과 예술가, 이렇게 구분된 세계관입니다. 즉 기존의 질서가 공고하게 지키려고 했던 하나의 체계로서의 가족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여성과 벗어난 결과가 사기와 예술의 무대, 즉 거짓의 세계라는 것이죠. 이러한 구분은 1930년대에도 여성의 일탈과 욕망을 다룬 영화가 있었지만, 결국 그 끝은 죽음, 그것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처벌한다는 결말을 유도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해 영화 속 상황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돋보였던 장면이 있는데 바로 ‘거울’이 중요한 장치로 연출된 장면입니다. 영화는 부부 싸움을 하던 남편의 모습을 애순의 어깨 너머 거울로 비춥니다. 그리고 부부 싸움이 격해지면서 애순은 거울을 흔들게 되고 남편의 이미지는 일그러지게 되죠. 이러한 부분은 감독이 영화 미학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여 이 장면을 TO BE로 뽑았습니다. ‘거울’ 외에도 ‘새장’, ‘의상’, ‘인형’ 등 나름의 상징을 가진 세심한 연출들도 있으니 영화를 보실 때 이런 장면들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미몽> 스틸컷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공식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캡처)


지갑은 텅 비었지만 지식은 충만한 '신여성'은 주인공 ‘애순’을 TO BE로 선정했습니다. 앞서 꿈꾸미가 세계관의 구분에 주목한 것처럼 신여성도 영화가 ‘애순’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에 주목한 것입니다. 애순은 영화 시작부터 남편과 싸우면서 등장해 갑작스럽게 사기꾼과 호텔 동거를 시작하고, 이후에는 무용수를 쫓다 자신의 딸에게 사고를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죠. 이 사건들 사이에는 큰 인과관계도 없이 애순은 계속해서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남편과 불화를 일으키고, 전통적인 문화도 거부하고, 자녀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어머니로서의 모성도 포기한 채 자유연애를 꿈꾸는 악녀로 그려진 것이죠. 이러한 설정에 대해 역사연구가인 이효인 선생님은 “당시 신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한 전략적 배치에 의한 것”이라면서도 동시에 이 배경에는 일제의 ‘현모양처’ 정책이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미몽, 식민지의 슬픈 얼룩’이라는 제목의 이 평론에 따르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성모(聖母)와 현모양처에 대한 강조를 하였기에 ‘신여성’은 비판을 넘어 응징할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애순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스스로 약물을 통해 벌하도록 연출한 것이죠.

 또한 이렇게 ‘애순’을 맥락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악녀로 묘사하여 특정한 질서와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절대적인 시대 흐름에서 벗어나면 응징당할 수 밖에 없다는 선전의 내용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양주남 감독이 연출을 맡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몽>이 개봉한 1936년으로부터 2년 전인 1934년에 양주남 감독은 이필우라는 감독의 녹음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한 신인이었기 때문이죠. 또한 당대 최고의 대중 소설가이자 연극계의 거대 그룹 동양극장의 리더이기도 했던 최독견과 조선과 만주 흥행업의 일인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사이에서 <미몽>이 제작된 것 역시 영화에 일제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효인 선생님은 영화에 대해 “일본의 영향 아래 놓인 조선의 대중문화, 일본인이 주도한 경성촬영소, 일본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사정 등이 일제의 통치정책과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미몽>에 대한 평론 제목이 ‘식민지의 슬픔 얼굴’이자 ‘근대를 열망하지만 그것에 다다를 수 없었던 식민지(영화)의 꿈’으로 쓰여진 것이겠죠. 이렇게 영화 속 애순의 꿈은 그녀의 현실에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질 없는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한 운명으로 배치해두고 응징과 죽음에 이르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신여성은 애순을 TO BE, 살리고 싶은 인물로 뽑았습니다.


자막달린 중국 영화는 필요 없는 자영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NOT TO BE로 뽑았습니다. 애순이 탄 택시가 딸을 치는 사고를 내어 병원으로 입원하자 남편은 애순을 응징하기 위해 총을 들고 병원으로 뛰어들어옵니다. 그러나 애순은 이미 스스로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난 후였죠. 영화는 죽은 애순과 꿈 속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딸,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며 총을 떨어뜨리는 남편을 보여주며 마무리가 됩니다. 사실 애순은 영화 내내 계속해서 지탄받아야 마땅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이는 애순의 죽음과 함께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는 복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편이 총을 버리는 순간, 애순은 응징의 대상에서 잘못된 선택을 끝까지 이어온 연민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응징에서 연민으로까지, 근대적 주체로 부상한 여성과 그들의 욕망을 애순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부정하고 일본적 정신무장을 선전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일본적 정신무장’이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전통적 정체성과 모성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해서 마지막 장면을 NOT TO BE로 선정했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책사는 남편을 연기한 배우, 이금룡 배우를 TO BE, 영화 속 주목하고 싶은 인물로 뽑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이금룡 배우가 연기한 남편 역은 좋은 가장의 모습으로 굉장히 선량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당시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죠. 물론 이것은 앞서 보았듯 ‘신여성’의 모습과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죠. 그러나 배우로서 이금룡 배우를 본다면 실제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과 가정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이금룡 배우(~1955)는 나운규 감독이 ‘나운규프로덕션’을 만든 뒤 창립작인 <잘 있거라>(1927)에서부터 시작해 나운규프로덕션의 전 작품에 출연한 핵심 배우라고 합니다.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20대의 나이에도 노인 역할을 너무도 잘 소화해 끝까지 함께한 것이라고 하죠. 물론 단역과 조연을 위주로 연기하였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고 합니다.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한 뒤로는 직접 연출을 맡기도 하였지만 흥행에 실패한 뒤로는 연기에 다시 집중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홍성기가 연출한 <열애>(1955)로 안타깝게도 작품을 끝마치지 못하고 촬영 도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촬영 도중 사망한 그를 기리고자 동료들이 한국 최초의 민간영화상인 금룡상을 제정해 수여했다고 합니다. 영화 <피아골>(1955)이 작품상, 감독상(이강천), 여우주연상(노경희)을 받기도 한 금룡상은 지금의 대종상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영화상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화상 중 하나로 이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금룡 배우의 당시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겠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분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TO BE로 선정헀습니다.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

 이번에는 <차이나는 무비 플러스>의 두번째 코너. 영화를 보고 떠오른 역사, 문학, 음악, 철학 등 인문학적 감성을 더하여 조선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시간,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발성 영화인 <미몽> 속 풍경, 사건, 장소,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할 인문학 드레싱들을 소개하겠습니다.


꿈꾸미는 영화와 관련된 조선의 건축 이야기를 가져왔는데요 바로 용산역과 서울역의 유래입니다. 영화에서 애순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 무용수 조택원을 따라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향하죠.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당시 서울의 이곳저곳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용산역과 서울역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요? 먼저 용산역은 서울역보다 먼저 190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서울에 처음으로 들어선 철도는 인천과 연결된 경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종점은 노량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열차로 한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한강철도가 개통이 되면서 용산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철도를 연결하면 서울역이 금방인데 용산역을 먼저 지은 것이 의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용산이 서울역이 위치한 남대문 근처보다 더 중요한 위치였다고 합니다. 용산 일대에 일본 군인들과 일본인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까지 미군부대가 위치한 용산기지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해 일제에게 있어서는 용산역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서울역은 남대문역이라는 이름으로 용산역의 보조역 수준의 작게 처음에는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 이후 경원선과 같은 새로운 노선이 생기면서 1925년 경성역으로 확장 및 신축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역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 역사를 이어가기 시작한 것이죠.



(왼쪽: 1900년대 용산역과 철길 모습, 오른쪽: 1940년대 미군의 행군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서울역,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그리고 2003년, KTX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역사(驛舍)를 만들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서울역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전의 서울역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죠. 프랑스 오르셰 미술관처럼 오래된 기차역을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이죠. 284는 구 서울역이 우리나라 사적 284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곳에서는 여러가지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용산역과 서울역이 발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식민지 역사와 더불어 광복 이후 근대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오래된 발성 영화에 서울역이 등장한 것은 당시 서울역이 주요한 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문화공간으로 바뀐 서울역은 앞으로 어떤 역사를 품고, 또 새로운 영화들은 문화역서울 284를 어떻게 담아내고 그려낼지 우리가 계속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자영업은 애순 역을 맡은 문예봉 배우를 인문학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1917년에 태어나 1999년에 세상을 떠난 문예봉 배우는 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3세살 무렵부터 무대에 서다 15살이던 1932년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인기 배우로 일약 스타가 되었죠. 이후로도 최초 발성영화인 <춘향전>, <아리랑고개>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말에 들어 일제의 탄업이 거세지면서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선전 영화와 같은 친일 영화에 참여하면서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문예봉 배우가 한국 사회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못한 결정적인 계기로 1948년 월북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북에서 살았지만 분명 이전까지 조선의 전설적인 여배우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면모가 드러나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차이나는무비플러스>에서도 이전에 다룬 적 있는 영화 <말모이>(2018)입니다. 극 중 김판수(유해진 분)가 당시 경성 최대 극장이었던 동양극장에서 표를 받는 일을 하였는데, 동양극장은 실제로 문예봉이 활약했던 극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박봉두(조현철 역)가 극장 앞에서 신작을 홍보하며 외친 이름이 문예봉입니다. <말모이>의 배경인 1930년대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배우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그러나 앞서 말했듯 1930년대 말부터 친일 영화 출연에 이어 194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라는 친일 단체에 가입해 일제의 침략 전쟁 및 민족 말살 정책 찬양, 지원병 선동 영화에 출연하였습니다.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조선영화인협회’에 뒤이어 만들어진 단체로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구성과 중일전쟁을 정신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단체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습니다.


문예봉 배우(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월북 이후의 삶 또한 순탄하지만은 못했습니다. 월북 이전인 1946년부터 남로당과 관련된 ‘남조선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년 뒤 월북한 이후로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으며 공훈 배우로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무용하면 최승희 안무가가 떠오르듯 연극하면 문예봉 배우가 떠오를 정도였다고 하죠. 그러나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이전까지는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1965년 《조선영화》 4월호에 게재한 수필에서 스승이자 동료 배우였던 나운규를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추방당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이죠. 복귀작은 1980년 <춘향전>으로 월매 역을 맡아 출연하고 1982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배우로서 또 신여성으로서 삶을 살다간 그녀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 당시, 그 순간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책사는 영화 속 또다른 실제 인물 조택원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영화 속에서 애순이 한 눈에 빠진 인물이죠. 조택원은 영화 속에서 본명으로 출연한 실제 무용수입니다. 앞서 잠시 조선 근대의 무용하면 최승희 안무가가 떠오른다고 하였는데 최승희의 라이벌이라도 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무용수였죠. 190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조택원은 어릴 적부터 예술, 문필 등 다양한 부분에 소질을 보이며 대학 시절(보성전문학교)에는 상업은행 테니스 선수로 발탁되어 학업을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7년 11월, 당시 일본 현대무용계의 거장이었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뒤 무용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어 무용을 배웠습니다. 최승희 역시 이때 공연을 보고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죠. 그래서 조택원과 최승희는 같은 스승을 둔 동료이자 라이벌로 함께 무용을 익히며 한국 신무용을 이끈 대표적 인물로 성장하였죠.

 1932년 경성으로 돌아온 조택원은 ‘조택원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친일색이 짙은 무용 공연을 연출하고 안무를 맡았기 때문에 이후 문예봉 배우처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용수로서의 업적과 친일 행적이라는 시대적 비극 사이에서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죠. 이렇게 우리 근현대사 속 숨겨진 인물들을 다시 소개하고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차이나는무비 플러스>가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조선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는 의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여성은 영화 한 편을 인문학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002년 작품 <그녀에게>입니다.



영화 <그녀에게(Talk to her)>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독특하고 풍부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두 명의 남자와 병원에 있는 두 명의 여자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자 간호사 베니뇨(하비에 카마라 분)는 발레를 추는 알리샤(레오노르 와틀링 분)를 보고 혼자 짝사랑에 빠지지만 알리샤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여행지 기자인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 분)는 투우사 리디아(로자리오 플로레스 분)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그녀에게 빠져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이내 리디아가 투우 경기 중 사고로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베니뇨와 마르코는 코마 상태에 빠진 그녀들을 간호하며 친구가 되죠. 그런데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베니뇨는 알리샤와 소통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지만, 마르코는 리디아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며 절망하고 결국 그녀를 떠나게 되죠. 알리샤와 아무 관계 없이 짝사랑만 이어오던 베니뇨는 맹목적인 헌신과 사랑을, 연인 관계에 있던 마르코는 오히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죠.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과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영화는 대사와 음악 뿐만 아니라 색감, 무용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보여줍니다. <미몽>에서 무용이 중요한 요소로 활용된 것처럼 말이죠. 무용과 영화와 음악이 잘 결합되어 감성적으로 심금을 울리는 영화 <그녀에게>를 <미몽>편 마지막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으로 소개합니다.


그럼 이상으로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를 마무리하고 다음에 다시 한국의 근대를 볼 수 있는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ㅣ팟캐스트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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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podbbang.com/ch/13254        


또 있습니다. 팟티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podty.me/cast/182234 


ㅣ네이버 오디오 클립ㅣ

오디오클립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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