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의 책문화공간 이야기
유럽에도 다양하고 특이한 문화공간이 많이 있다. 그러나 마을 전체가 책방인 감성 충만한 곳이 있다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런데 그런 곳이 동화 속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도 단순한 전시공간이나 테마관광지가 아닌 마을 사람들이 책방을 하면서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하며 삶을 영위하고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은 바로 총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다. 헤이온와이에는 크고 작은 헌책방이 40여 개나 있으며,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100만 권의 헌책이 판매된다.(2010년 기준)
헤이온와이는 ‘헤이 강 골짜기 언덕에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뜻으로 잉글랜드와 웨일즈 접경 지역에 위치한다. 헤이온와이는 런던 시내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며 철도역, 버스역도 없는 교통이 불편 지역이지만 영국 국립공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역적 특징이 있다. 브레콘 비콘스 국립공원에서 와이 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간 곳의 작은 마을이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계 최고의 헌책방마을이 된 것일까? 그렇게 되기까지는 고향을 아끼고 사랑한 리처드 부스(1938~2019)의 열정과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리처드 부스는 2011년 국내 파주북소리 잔치에 초대되어 한국을 방문한데 이어, '2015 군포독서대전’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문한 적이 있다. 세계책마을협회의 명예종신회장이며 관광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의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헤이온와이의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양과 토종 조랑말을 기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장들 대부분이 영세하여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멀리 다른 곳으로 이주해 나가는 농촌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1960년대 초반에는 대형 슈퍼마켓들이 생겨나면서 전통적인 작은 가게들은 살아남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마을 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한 미래로 고민하던 시기인 1961년, 헤이온와이에서 나고 자란 리처드 부스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어떻게 마을을 되살릴지 고민하다 ‘마을의 빈 건물을 헌책방 명소로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게 된다.
그는 가장 먼저 낡은 소방서 건물을 싼값에 사들여 헌책으로 채워나갔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헌책방이 되겠냐?”는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처드 부스는 계속해서 책을 구입하였다. 소방서를 책으로 다 채웠지만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좋은 책을 보유하면 사람들이 오게 되어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대학도서관이나 대저택 등 책을 정리한다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가 헌책을 사들였다. 때마침 영국의 많은 대형 도서관들이 수세기 동안 수집한 책들을 싼값에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리처드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보물 같은 책들을 구입하였다.
그렇게 마을의 공간을 헌책으로 채운 다음 리처드 부스는 헤이온와이를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7년 4월 1일 만우절을 기해 헤이온와이를 ‘서적 왕국’으로 칭하며 독립을 선포하였고 스스로 자신을 ‘서적왕 리처드’로 추대하는 등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또한 독자적으로 의원을 선출해 의회를 열기도 했다. 여기에 헤이온와이만의 화폐, 우편, 신문, 여권까지 발행하였다. 그의 예상대로 이 일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단기간에 마을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매체를 통해 세계로 헤이온와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려오게 되었다.
리처드의 집념이 하나둘씩 실현되자 마을 주민들도 동참하게 되었고, 마을 곳곳에 속속 헌책방이 생겨났다. 오래된 성, 문 닫은 극장, 버려진 집, 쓸모없던 창고가 속속 헌책방으로 바뀌면서 세계 최초로 헌책방마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느새 이곳은 ‘책마을’이란 별칭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다. 책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방대한 도서들을 찬찬히 구경하려면 몇날 며칠을 이곳에 머물러야 하므로 그들을 위한 숙박업소와 식당, 술집이 생겨났고 주민들도 하나둘씩 헌책방이나 오래된 물건을 수집해서 판매하는 골동품가게, 자기가 만든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가게 등을 열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작은 마을은 헌책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해갔다. 이렇게 헤이온와이 주민 전체가 헌책방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헤이온와이는 세계에서 헌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고전문학, 아동서적, 예술서적, 스포츠도서, 추리소설 등 한 분야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에서부터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함께 파는 종합 서점까지 여러 형태의 서점이 있다. 면적이 600제곱미터가 훨씬 넘는 대형 서점부터 중소형 서점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들어설 수 있는 서점, 미로와 같은 지하를 지나야 서가가 드러나는 서점, 성벽을 따라 만든 4킬로미터나 되는 야외 책장을 둔 서점, 고른 책값을 알아서 지불하는 무인 서점 등 형식도 각양각색이다. 그야말로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즐거운 놀이터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리처드 부스가 운영하는 서점에 들어서면 간판 위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Books bought Anywhere in the World.’ 직역하자면 ‘세상 곳곳에서 책을 샀다’다. 그래서 ‘온 세상의 책이 전부 여기에 있다, 또는 세상의 모든 책이 여기에 있다’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책을 단돈 1파운드(or 2파운드)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기도 한다. 헤이온와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헤이성 서점은 헌책의 성지로 1, 2층 모두 책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대략 100만 권이 넘는 헌책과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다.
헤이온와이에서는 책 축제도 열린다. 매년 5월 마지막 주 열흘 동안 ‘헤이 축제(Hay Festival)’를 하는데 이때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각종 문화행사, 국제교류 등을 한다. 작가, 시인, 역사가, 환경운동가, 정치인들이 함께 모여 강연, 전시, 시낭독, 작가와의 만남 등 200여 개의 행사를 즐길 수 있다.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어 전 연령층을 포괄한다. 1988년 시작된 이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관심을 받으며 발전해나가고 있다.
헤이온와이 마을이 문화적 도시재생에 성공한 이유는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예술 및 문화발전에 강력한 옹호자가 될 수 있는 공동체 리더(리처드 부스)의 역할을 꼽는다. 도시재생의 핵심에는 ‘인간’, 그중에서도 인간의 삶의 질이 존재한다. 리처드 부스는 고향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낯선 타지로 떠나지 않고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공간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1,300여 명 주민들과 함께 헌책이라는 문화 요소를 매개로 지역적 차별성을 갖는 마을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 결과 헤이온와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책마을’이라는 차별화된 지역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관광 증대와 지역 발전이라는 큰 효과를 얻고 있다.
참고 자료(관련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itfrQI8Tlk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