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없는 배움을 응원합니다
카카오톡에서 ‘같이가치’ 폰트를 새로 내놨다. 폰트 이름이 ‘같이 가치-000할머님 폰트’라 되어 있길래 새로 한글을 배우신 할머니들의 글씨체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글을 모르던 할머니 네 분이 카카오 사회공헌 프로젝트 ‘같이 가치’를 통해 한글을 배우면서 직접 제작하신 폰트라고 한다. 한글에 더해 특수문자와 영어까지 만들어야 해서 이래저래 고생하셨다고.
한국은 문맹률이 낮다. 정부는 나서서 '낮은 문맹률은 한글의 우수함 덕'이라며 으스댄다. 그런데 암만 봐도 그건 필요 이상의 호들갑이다. 아니 때론 무책임한 소리 같다. 내 생각에 근대교육 인프라만 잘 마련하면 상형문자가 아닌 다음에야 자연스레 낮아지는 게 문맹률이다.
그러나 반대로, 교육체계가 잡혔더라도 생계문제나 문화적 인식 때문에 학교 문턱을 못 밟는 이들이 있다면, 글 못 쓰는 사람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건방지지만 상상컨대 저 할머니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전쟁 끝난 나라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거나,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집안에서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거나, 큰오빠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한글보다 돈 세는 걸 먼저 배워야 했거나,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는 세상에 떠밀려 어린 나이에 방직공장으로 들어가야 했거나. 내가 배우고 듣고 봐온 게 맞다면 그런 경우가 절대다수일 테다.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수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낮은 문맹률과 한글의 우수성을 암만 번지르르하게 광고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것이다. 그건 폭력이다. 정상의 대오를 만들고 그 줄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소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 버리는 것. 다행히 요즘은 노인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 가는 것 같다. 공공기관도 그렇고, 카카오 같은 사기업 영역에까지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니 주체가 누구인가를 떠나서 참 좋은 일이다.
얼마 전 마포도서관에 갔더니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쓴 글이 벽에 붙어 있었다. 배움의 즐거움을 뽐낸 글도, 어려움을 토로한 글도 있었다. 비록 삐뚤삐뚤한 글씨였지만 펜을 꾹꾹 눌러가며 쓴 그 철자들은 참 예뻐 보였다. 적어도, 배운 사람 떠받들고 못 배운 사람 서럽게 만들면서 세상을 조금씩 추워지게 해 온 인간들 마음새보다는 훨씬.
물론 내가 이 폰트를 다운받는다고 해서 폰트 제작자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갈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산다는 게 만사를 꼭 그렇게 구체적으로만 대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한번 설정해 봤다. 네 분의 폰트 중 내가 자주 쓰는 단어들과 자주 대화하는 사람들 이름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권정애 할머니 작품. 조금씩 익숙해져볼까 한다.
폰트를 설치하고 보니 총명하기로 소문났다지만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프셔서 나는 한 번도 글씨 쓰는 걸 본 적 없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일본어는 대학생 과외까지 할 정도로 능숙했지만 한글은 철자를 자주 틀리시는 외할머니의 얼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때없는 배움을 언제나 응원한다.
https://tv.kakao.com/channel/2658091/cliplink/37915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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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의 홍보글 링크. 자세한 제작비화 등이 나와 있다.
https://together.kakao.com/magazines/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