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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Apr 05. 2018

삐뚤빼뚤해도 괜찮습니다

때없는 배움을 응원합니다

카카오톡에서 ‘같이가치’ 폰트를 새로 내놨다. 폰트 이름이 ‘같이 가치-000할머님 폰트’라 되어 있길래 새로 한글을 배우신 할머니들의 글씨체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글을 모르던 할머니 네 분이 카카오 사회공헌 프로젝트 ‘같이 가치’를 통해 한글을 배우면서 직접 제작하신 폰트라고 한다. 한글에 더해 특수문자와 영어까지 만들어야 해서 이래저래 고생하셨다고.


폰트를 만드신 네 분! 출처: 카카오 같이가치 홈페이지

한국은 문맹률이 낮다. 정부는 나서서 '낮은 문맹률은 한글의 우수함 덕'이라며 으스댄다. 그런데 암만 봐도 그건 필요 이상의 호들갑이다. 아니 때론 무책임한 소리 같다. 내 생각에 근대교육 인프라만 잘 마련하면 상형문자가 아닌 다음에야 자연스레 낮아지는 게 문맹률이다.


그러나 반대로, 교육체계가 잡혔더라도 생계문제나 문화적 인식 때문에 학교 문턱을 못 밟는 이들이 있다면, 글 못 쓰는 사람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건방지지만 상상컨대 저 할머니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전쟁 끝난 나라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거나,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집안에서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거나, 큰오빠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한글보다 돈 세는 걸 먼저 배워야 했거나,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는 세상에 떠밀려 어린 나이에 방직공장으로 들어가야 했거나. 내가 배우고 듣고 봐온 게 맞다면 그런 경우가 절대다수일 테다.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수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낮은 문맹률과 한글의 우수성을 암만 번지르르하게 광고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것이다. 그건 폭력이다. 정상의 대오를 만들고 그 줄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소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 버리는 것. 다행히 요즘은 노인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 가는 것 같다. 공공기관도 그렇고, 카카오 같은 사기업 영역에까지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니 주체가 누구인가를 떠나서 참 좋은 일이다.

폰트 실행화면


얼마 전 마포도서관에 갔더니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쓴 글이 벽에 붙어 있었다. 배움의 즐거움을 뽐낸 글도, 어려움을 토로한 글도 있었다. 비록 삐뚤삐뚤한 글씨였지만 펜을 꾹꾹 눌러가며 쓴 그 철자들은 참 예뻐 보였다. 적어도, 배운 사람 떠받들고 못 배운 사람 서럽게 만들면서 세상을 조금씩 추워지게 해 온 인간들 마음새보다는 훨씬.


물론 내가 이 폰트를 다운받는다고 해서 폰트 제작자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갈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산다는 게 만사를 꼭 그렇게 구체적으로만 대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한번 설정해 봤다. 네 분의 폰트 중 내가 자주 쓰는 단어들과 자주 대화하는 사람들 이름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권정애 할머니 작품. 조금씩 익숙해져볼까 한다.


폰트를 설치하고 보니 총명하기로 소문났다지만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프셔서 나는 한 번도 글씨 쓰는 걸 본 적 없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일본어는 대학생 과외까지 할 정도로 능숙했지만 한글은 철자를 자주 틀리시는 외할머니의 얼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때없는 배움을 언제나 응원한다.


https://tv.kakao.com/channel/2658091/cliplink/37915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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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의 홍보글 링크. 자세한 제작비화 등이 나와 있다.

https://together.kakao.com/magazines/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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