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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Jan 04. 2019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학교 앞에 저가형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눈에 띄게 늘었다. 피곤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막학기 학생인 나는 그 가게들을 아주 애용하고 있다. 정신의 반쯤은 저 꿈나라에서 빼내오지 못한 상태에서 카페인은 게임 속 포션처럼 체력을 채워준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물보다 아메리카노를 많이 마신다. 그저 링겔처럼 빨대를 입에 꼽은 채 학교 정문을 향해 걷는다. 뭐 도리가 있나.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듣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노래 속 믹스커피처럼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오지는 않지만,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인 건 마찬가지다. 십년 된 노래인데 어째 젊은 것들 삶은 강산보다도 덜 변했다. 커피의 오묘한 풍미보단 잠 깨우는 기능이 더욱 절실한, 그야말로 싸구려 커피의 세상. 자영업이 트렌드 따라 철새처럼 옮겨다닌다지만 이 종목만큼은 쭉 계속될 것 같다. 이 사회가 싸구려 커피를 계속 권하는 한.

싸구려 커피를 파는 가게들은 대부분 에너지 드링크를 함께 판다. “카페인에 타우린을 싸서 드셔보세요” 같은 느낌일까. 말만 들어도 잠이 확 달아난다. 예전 유행했던 스누피 커피우유가 떠오른다. 카페인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박아서 없던 피로도 사라지게 만들었던 그거. 피곤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기계 같은 우리는, 저마다 짙은 갈색 보조배터리를 하나씩 꼽고 다녀야 하는 걸까.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일인분을 할 수 있는 걸까.

잠만 깨면 그만인 나 같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기왕이면 값싼 커피가 좋아서, 키오스크 기계가 설치된 저가형 테이크아웃 커피가게를 찾는다. 좁은 부스 안에 알바생 두 명 정도가 밀집해 있다. 겨우 두어 명에게 ‘밀집’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 정도로 가게는 좁다. 바쁘게 움직이는 너의 손끝에서 나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한 삽화를 떠올린다. 자판기 안에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린 그림이었다. 그린이의 소망과는 달리, 실제로 보니 그렇게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자동화기기를 사이에 두고 싸구려 커피를 주문하는 나와, 그 뒤에서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너는 무척 닮아 있다. 너와 나는 같은 학교 학생일 가능성도 높다. 어쩌면 아주 예전에 같은 수업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이니 예술이니 시대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같은 고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언제 한 번이라도 우리에게 그런 사치를 허락했던가. 이 싸구려 커피 같은 세상은, 각얼음처럼 시퍼렇던 우리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녹아내려 밍밍해지기만을 요구해오지 않았던가. 잠 쫓는 약품을 입에 물고 헐레벌떡 달려가지 않으면 절벽에서 떨어트리겠다고 내내 협박해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너와 나는 지금 키오스크를 사이에 두었나.

솔직히 별 감상은 아니다. 나는 그냥 다른 데서 번 돈을 여기에 쓰는 것뿐이고, 너는 여기서 번 돈을 다른 데 쓰겠지. 나에게 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너와 나의 노동, 우리 모두의 노동을 폄하하는 글일지도 모른다. 암만 봐도 괜한 유난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러울까. 사는 나도 파는 너도 자판기 안에 개어져 있는 이 그림이. 커피를 사 들고 또 다른 자판기 속으로 흘러가야 하는 우리 처지가. 뭐 도리가 있나. 이런 마당에 도대체 무슨 도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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