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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Oct 19. 2016

글에도 지문이 있다

살아있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몇 달 전 대학 후배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다.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하던 후배였다.


그때 그놈은 의경 말년이었고, 나는 휴학을 고민하는 한 마리의 슬픈 복학생이었다. 화제는 근황과 미래 걱정 등을 잠시 걸치곤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흘러갔다.


후배는 나처럼 밝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퉁명스러운 글밖에 쓸 수가 없다면서 퉁명스럽게 툴툴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글에 묻어나는 그런 퉁명스러움을 꽤 좋아한다. 서로 칭찬하기 민망한 사이라 굳이 그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화를 나누고 머지않아 나는 휴학을 했다. 휴학을 하니 좋은 글을 더 자주 읽게 됐다. PPT나 프린트에 모래처럼 흩뿌려진 건조한 활자들만 보다가, 요즘은 숨과 결이 살아있는 문장들을 읽는다. 산책하듯 문장들을 하나씩 넘겨가며 하나의 글을 완독한다. 그리고 어쩌다 목이 벅차도록 좋은 글을 읽고 나면, 손가락처럼 글에도 지문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좋은 작가일수록 강렬한 지문을 남긴다. 글뿐만이 아니다. 모든 훌륭한 작품은 어떤 뚜렷한 세계를 품는다. 창작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투영된 뚜렷한 세계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지문처럼. 그런 것들은 독자의 마음 속에 사건현장처럼 지문을 찍는다.


이제 독자의 차례다. 훌륭한 독자는 지문을 잘 읽는다. 작가가 남기고 간 지문을 단서로 독자는 수사를 시작한다. 범인의 생각과 시야를 되짚으며 그의 세계를 알아간다. 범인은 대담할수록, 탐정은 유능할수록 좋다. 오래된 목수가 한 번 쓰다듬는 것으로 원목을 구분할 수 있듯, 이름난 요리사가 재료를 슬쩍 보고 원산지를 알 수 있듯, 훌륭한 독자는 글에서 결을 읽고 지문을 본다.



물론 글이 작가를, 작가가 글을 완전히 대변하는 건 불가능하다. 괜찮은 글을 쓴 사람이 만나보니 개차반인 경우가 종종 있다. 반대로 정말 좋은 사람인데 못난 글을 자꾸 쓰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섬세한 글쓴이가 글에 부여한 지문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지문의 모퉁이를 정신없이 지나다 보면,


전혀 새로운 세계와 어깨를 부딪히는 즐거운 경험도 가끔 겪게 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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