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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r 09. 2020

서른 즈음일까

또 하루 멀어져간다고 한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단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십대가 되기 전부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내 서른 즈음도 이럴 줄로 알았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모든 걸 허망해할 것 같았다.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 청춘을, 반쯤은 의연하게 반쯤은 찌질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올해, 기어코, 서른 즈음이 되고 말았다. 가끔 퍽 쓸쓸할 때도 있지만, 김광석이 처연하게 읊조리던 그 마음의 언저리에도 가닿지 못하고 있다. 서른 즈음에도 난 여전히 유튜브가 재밌고, 가능하면 더 많이 놀거나 먹고 싶으며, 머틀리 크루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보인다.

세상이 말하는 '서른 즈음에'와 내가 겪는 '서른 즈음에'가,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나아진 것이라고는 온갖 알량한 것들 뿐이다. 야바위꾼은 평생 철들지 않지만 야바위 솜씨만큼은 매일 늘어간다. 사는 게, 내 얕은 밑바닥일랑 컵 속에 숨겨두고, 손이나 현란하게 휘저어가며 남들을 속여온 것 아니었을까.

얄궂게도 서른 즈음에 삶이 많이 바뀌었다. 서른 즈음에야 진로를 잡고, 서른 즈음에야 취업을 했고, 진짜 서른 즈음인 올해는 이직까지 해버렸다.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서른 즈음에'다. 남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세상에 던져지면 어느덧 스물 초중반. 대학 다녔으면 중후반. 스펙이다 뭐다 이것저것 끌어모으다 보면 어느새 서른 즈음에.

우리 시계가 조금씩 늦춰진 모양이다. 김광석이 반지하 클럽에서 노래할 때보다는, 그때보다는 확실히 느려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서 자랐다는 거다. 이나이쯤 되면, 지금은 없어진 흑석동 '동학' 같은 곳에서, 막걸리 부딪히며 매일의 이별을 쓸쓸해할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개뿔이다.

슬프지는 않다. 확실히 좋은 점이 있다. 서른 즈음인 모두가 이러고 있기 때문에, 서른끼리는 서로 '서른 즈음에' 같은 무거운 책임을 씌우지 않는다. 천천히 철들고 천천히 나이먹어도 괜찮아졌다. 문제는 구조가 우리보다 더 늦게 바뀐다는 것이겠다. 아직도 서른 즈음을 사는 이들에게, 머리가 희끗한 면접관이 '서른 즈음에 뭐 했어요'라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나. 매일 이별했지만, 비어가는 가슴에 뭐라도 담으려 했다고,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떠나보내지도 떠나오지도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주나. 2020년의 서른 즈음은 서른 즈음이나 될까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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