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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y 17. 2020

오래된 내 강아지

이별에 둔감해져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영영 같은 반일 것 같던 친구들이 전학이다 뭐다 하며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할 때, 그래 그때는 이별에 민감했다. 그때마다 나는 엉엉 울던 아이였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덜 울게 되고, 그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내 머리로는 덜 우는 사람이 곧 어른이었고 나를 울게 하는 일은 소중한 것들의 떠남이고, 그러니까 결론은 소중한 게 떠나도 울지 않는 사람이 어른이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키운 강아지는 모란시장에서 우연히 업어 온 작은 똥개였다. '삐야'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삐야는 종도 없었고 아무데나 똥을 쌌고 그 똥을 먹었다. 그런 삐야를 나는 사랑했다. 삐야는 나랑 비슷한 속도로 나이를 먹다가 언젠가부터 나보다 조금 더 빠르게 자랐고 생각없이 놀다 집에 들어온 어느 날, 나는 삐야가 없는 거실에서 삐야가 광주의 한 할머니댁에 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없는 살림에 비좁은 집구석에 개 한마리 키우느니 아는 사람 시골집에 개를 보내는 게 개에게나 우리에게나 나았다는 걸, 함께하는 것도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당연히 몰랐다.
엉엉 울어대는 내게 아빠는 잠들 때마다 어떤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의 영웅 삐야' 시리즈. 엉성하게 지어 낸 엉터리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에서 삐야는 아프리카 초원의 악당 치타를 때려잡고 사자를 골탕먹이는 히어로가 돼 있었다. 우리의 영웅 삐야에게 된통 당하고선 궁뎅이를 부여잡고 헐레벌떡 도망가는 치타의 모습을 상상하며 깔깔대다 보면 그게 스르르 꿈이 됐고 일어나면 언제나 다음날이었다. 그 다음날의 다음날의 다음날이 계속되고 친구들이 하나둘 어디론가 떠날 나이가 되고 그때마다 엉엉 울다가 점점 눈물이 줄어들던 그때쯤, 삐야가 광주의 마당 딸린 할머니집에서 행복하게 뛰어놀다가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때쯤, 이별에 둔감해야 어른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였다.
스무살 무렵 아이티에서 큰 지진이 났다. 어떤 기자가 뉴스에 나와 말해줬다. 아이들이 진흙으로 만든 과자를 먹고 있다고. 그게 무슨 과자라고 받아들고는 해사하게 웃는 아이들 사진 앞에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정작 마음이랄 게 있다는 가슴께를 보면 헤진 곳 없이 말끔했고 점심이면 나는 밥 맛있게 먹었다. 스마일이 그려진 진흙 과자를 집어드는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만난 적도 없이 이별했다. 그러다가 내 손은 막 기름진 고기반찬 하나라도 더 집으려고 추하게 애쓰던 그때, 정확히 말하면 그런 추한 나를 발견했을 때 아 이 세상이 내 생각보다 너무 넓구나, 라고 느꼈다. 세상이 너무 넓어서 지구 반대편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엔 엉엉 우는 것도 들어 있었지만, 엉엉 우는 것보다 차마 더 할 수 없는 일은 아예 그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별에 둔감해져도, 그건 내가 어른이 됐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게 넓은 세상에서는 만난 적 없는 이들과의 이별도 나를 계속 치고 지나갔다. 어떤 일들은 수십 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나를 만나보고선 아무 말 없이 가버리기도 했다. 4월이나 5월쯤, 다 큰 어른들보다 더 늙은 어른들이 어느 날만 되면, 내 새끼의 조그만 묘비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도 봤다. 당연히 세상의 모든 일이 나를 엉엉 울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건 세상이 너무 넓어서 내가 엉엉 울만한 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벌어지고선 지나가버리고 말아서일 뿐이다. 엉엉 우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엉엉까지는 아니지만 잉잉, 하고라도 울게 되는 건 적어도 내가 어른이 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별이 많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자기만 큰어른 된 것처럼 남들한테 야 울지 마라 응석부리지 마라 시끄럽게 굴지 마라 벼슬이냐 이런 말을 할 수 없고, 당장 내일 숨이 막힐 사람에게 '나중에 나중에'라고 외칠 수도 없는 것이다. 헤어지지 못한 이별은 감기처럼 돌아오고 그때마다 우리 몸은 끙끙 앓도록 설계됐으니까. 타인의 감기라도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아프고, 우리 모두 감기를 한번쯤은 걸려 본 입장에서 아픈 게 죄다 그 사람 탓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어떤 이별도 누군가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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