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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Oct 23. 2021

그날 차 안에서 우리 트로트 들었지

김순남씨


이사가는 날. 비까지 내리고. 정신없이 오가는 파란 박스와 장롱과 침대. 한껏 예민해진 가족들. 그 와중에 그들은 늙은 당신을 그렇게 신경써주지 못했지. 못은 때로 안이기도 했어. 애초에 당신은 그리 환영받으며 우리집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었으니. 엄마의 다른 형제들은 누구를 맡아줄 형편이 아니었고, 당신은 밀린 숙제처럼 우리집에 들어와 몇 년을 살았지.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형제 가운데 혼자만 성씨가 달랐던 우리 엄마는 당신에게 나름의 상처가 있었고 다른 가족들은 당신과 조금 데면데면했어.


당신이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나도 참 초라한 처지였고 그래서 우리는 많이 친해졌지. 한때 당신은 서울 신림동 집에서 나를 하숙시켜준 때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당신이 조금은 어려웠어.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나 서로가 가장 못난 시절에 다시 만난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잘 지냈지. 점심에는 볶음밥 곱빼기를 시켜서 나눠먹고, 당신은 TV를 보고 나는 고장난 내비게이션처럼 내 앞길 하나 못 찾고 달력만 내다버리곤 했지.


심심하면 함께 TV를 보며 쓰잘데없는 얘기를 아무렇게나 풀어놓았지. "나는 저 사람 인상이 참 좋다" "아니 인상으로 판단하면 어떡해" "그러냐" "뭐 그렇지 뭐, 근데 진짜 저 인상이 좋아?" 트럼프 보면서 이런 대화도 하고. 불쌍한 사람 보면 "나쁜 사람 천지삐까리다 다 사기꾼이데이" "맞아맞아 그렇지" 이러고. 당신은 한글 쓰기는 서툴렀지만 일본어는 완벽했고 나는 그 사실이 조금 마음 아렸고. 뭐 그런 시간들.


이사가는 날은 그런 중에 찾아왔어. 정신없는 가족들은 당신을 챙기기 어려웠고, 누군가의 챙김이 필요했던 당신 옆에는 당연히 내가 배정됐지. 나도 사실은 그게 좋았어. 서로 챙김을 꽤 오래 나누던 사이였으니 딱히 어렵진 않겠더라.


그날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안에서 둘이 몇시간을 보냈잖아. 수다를 떨다가 난 별 생각 없이 트로트를 틀었어. 요즘 나오는 트로트 말고, 옛날에 녹음된 진짜 노래들을.


그때 갑자기 노래를 따라부르던 당신에게 나는 조금 놀랐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거의 모든 노래를 따라부르더라. 신나서 따라부르는 당신의 표정은 80대의 그것이 아니었어. 경북 영천에서 나름 빛나던 젊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 세상 말처럼 오락가락하는 노인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던 당신의 세계를 만난 느낌. 정말 소중한 순간은 공기와 냄새와 습도까지 기억되곤 하는데, 그날 그 장면은 아직도 내 마음에 그렇게 박혀있어. "할머니 이거 언제 처음 들었어?" "어쩌다가" 이런 대화들.


트로트 듣던 그날을 생각하면 그로부터 몇 년 전의 어느 날도 함께 떠오르곤 해. 우리 가족이 다른 동네에 살 때 명절을 맞아 며칠 머물려고 온 당신. 그때 나는 어줍잖은 꿈을 꾸던 애였고 내가 아는 모든 어른들이 나를 말렸는데 산책길에 당신은 문득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해줬어. 현실이니 재능이니 너를 위해서니 뭐니 하는 말들에 포위돼 있었는데, 그렇게 말해준 어른이 내겐 처음이었어. 지금은 꿈이 바뀌었는데 그 말은 아직 녹지 않았어. 취업한 지금에야 잘했니 어쨌니 하는 얘기 듣지만, 나 진짜 아무것도 아니던 때에 그런 말 해준 어른 당신밖에 없었어.


다른 세상으로 떠난 가까운 사람.  사람에 관한 글을 쓰는 . 때로 그건  못할짓으로 느껴지곤 .  하나 쓰려고 남의 삶을 이용하는  같잖아. 그래도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시큰함이 조금 무뎌진 뒤엔 당신 앞에 이런 글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어. 당신이 떠난  얼마   날에, 대학 졸업장도 없던 나는 "언젠가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당신을 만날  안다" 다짐했어. 지금 나는 명함도 생기고 월급도 받고 서른도 넘겼는데. 매일매일 좌충우돌하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이런 나를 당신이 보면  좋아할 텐데. 정말 기뻐할 텐데. 힘든 새벽이면 그날 생각이 종종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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