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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y 06. 2021

하루를 쓸다


삑삑삑삑 도어락을 누르고 여덟 평 남짓 어둠을 연다. 길었다 오늘 하루도. 밤하늘에 눌린 채 걷느라 내려앉은 어깨를 편다. 질질 끌리느라 고생한 신발을 벗는다. 양말은 빨래통에, 겉옷은 원래 있던 자리에 걸고, 마지막까지 걸치고 있던 먼지투성이 하루를 아무데나 벗어던진다.


침대에 바로 누워 눈을 감는다. 눈꺼풀 속에서 나는 빗자루를 꺼낸다. 길었던 하루를, 천천히 쓴다. 구석부터 가운데로. 안에서 밖으로. 뽀얗게 앉은 먼지들이 아지랑이로 핀다. 재채기가 나온다.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몸의 반응. 마스크도 없이 빗자루질을 하니까 그렇지. 어차피 원망할 대상은 나뿐이다. 누가 내 집을 더럽힌 것도 아닐 테니까.


쓸어낸 하루를 펼쳐 탈탈 턴다. 빗자루를 용케 피한 작은 먼지들이 폭탄 터지듯 깨어나 덮친다. 생각지도 못했던 자욱한 포연에 쿨럭, 유독 심한 날엔 울컥. 그런데 울컥하는 일에도 어떤 자격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가끔 해. 예컨대 우울하면 울 수 있고 아프면 앓을 수 있는데 내 우울은 엉엉 울기엔 좀 애매하게 얕고, 아픔은 그냥 남들만큼이거나 다소 덜하다.


사실 주변 사람들(한 2~3명 정도?)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뭔가 울적한 게 가랑비처럼 옷에 젖어 있는데, 그 정체가 뭔지 잘 모르겠고, 그나마 짐작 가는 이유들을 방바닥에 쫙 늘어놓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울적할 이유 같지 않다고, 그래서 울적할 자격이 없는 거 같은데 왠지 자꾸 울적해져서 짜증이 난다고. 그들은 당연히 아냐라며 위로해졌고 나는 또 아 내가 찡찡댔구나, 이런 말을 하면 위로해줄 착한 사람들만 영악하게 골라가지고 막 얘기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버리는 것이었다.


울지도 앓지도 못하는 대신 빈 공간만큼은 계속 넓어진다. 우울하면 울면 되고 아프면 앓으면 되는데 텅 빈 건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까. 내 안의 풍부가 없는데 글을 어떻게 쓸까. 왜 쓰지? 아니 뭘 쓰지? 글쓰기가 한 끼 상차림이라면 앗 손님 죄송하지만 밥솥에 밥이 없어서요, 멋쩍어하며 라면이나 끓여오는 이상한 주인장에겐 손님이 끊길 테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기소개서 쓰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때 난 남몰래 남들을 부러워했다. 구르는 낙엽으로도 삶을 바꿔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내 삶에 산사태가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타입이었다. 자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연극대본처럼(내가 ~~~랬더니 걔가 %%%라고...) 내게 말해주는 사람들의 쉴 새 없는 입술이 부러웠다. 난 왜 저렇게, 언제든 자기 얘기를 테이프처럼 풀어낼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저장하면서 살지 못할까?


도려낸 것들을 생각한다. 매번 뭔가를 도려내야 하는 삶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새살을 베는 감각이다. 이러다 도려낼 게 더는 남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군더더기 없이 샤프하고 완벽한 삶일까, 빈껍데기 포장지처럼 나뒹굴다가 어느 날 바람에 치여서 아무도 모를 곳으로 갈까.


오늘은 리베카 솔닛 책을 읽었다.  곳의 푸름을 찬양하는 글을 보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파랑이  우울의 색인지 몰랐는데 읽고 나니 어렴풋이  것도 같고. 읽고 나서 나는 지금  삶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조금 미신 같지만) 지금  한국나이로는 30대의 첫발이고 만나이로는 20 마지막이라서. 한국사람은  가지 나이를 동시에 의미화할  있어서 다행이다. 헛살면    같다는  느낌을 지키며 올해를  거야.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라는 말은 늘 꼬리표처럼 붙으니까. 빼도 되겠다. 그런데...


글쓰기 멘토들은 접속사 쓰지 말라고 장문 쓰지 말라고 타이르는데 전부 다 사이비 같다. '그런데'가 없는 하루가 어떻게 글이 될 수 있을까? '풀어낸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단타짜리 문장에 차곡차곡 다 들어가?


한국 작가 중에선 이상이 제일 좋다. 이상 글 주인공들을 보면 하나같이, 뭐 무슨 우울한 일만 생기면 방부터 더러워진다. 그렇게 살기 싫어. 하루를 쓴다. 쓸어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다. 기침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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