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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Apr 16. 2021

그날 술집에는 유독 손님이 없었다

오늘과 나, 부끄러운 고백


1.


그날 술집에는 유독 손님이 없었다.


서울 사는 친구가 우리 동네에 놀러 오기로 한 날이었다. 논대봐야 어디 술집가서 술 먹거나 PC방 내지 노래방이 전부였던 스물셋. 저녁으로 순대국밥 먹고 바로 술집으로 향했다. 4월의 밤공기에 쌀쌀해진 몸이 소주 한 잔에 부르르 떨었다.


기사나 뉴스를 챙겨보지 않던 때였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거리를 좀 두려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나도 그날 오전에는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전남 어디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고 그 배엔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있다고 했다. 네이버 뉴스 코너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전원 구조." 속보로 뜬 네 글자에 바보같이 마음을 놓았다. 기사나 뉴스를 잘 안 보던 때였고 그래서 언론을 몰랐다. 거의 모든 언론사가 동시에 '오보'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예 상식 밖이었다. 국가가 물에 빠진 사람을 안 구할 수도 있으니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땐 왜 그렇게 순진했을까.


MBC


속았다. 그날 저녁 나는 속은 채 재밌게 술을 마시며 후레시 한병 더 주세요 안주 더 시킬까 어쩌구저쩌구 떠들고 친구랑 빠이빠이했다. 그날 술집에는 유독 손님이 없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겠지만 아마 우리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속은 바보들끼리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으며 마셔대고선 안전하게 귀가까지 해버렸다.


다음날 아침에야 왜 그날 술집에 손님이 없었는지 알았다. 슬프고 분하고 부끄럽고 그와중에 숙취로 머리가 아픈 내가 끔찍하고. 언론이라는 것에도 짙은 환멸을 느꼈지만 가장 싫은 건 나였다. 해마다 이날이 돌아오면 나도 남들과 함께 앓았지만 함께 앓는 이들 틈에서도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남몰래 긍긍대곤 했다. 복학하고 나서 만난 후배들은 나를 '사회 문제에 관심 많은 선배'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매년 나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2.


그해 여름 나는 진도체육관에 있었다.


계획 없이 여행하던 중에 문득 발이 그곳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 무슨 마음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막 대단한 결심은 없었다. 그냥 '문득' 정도였다고,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다. 터미널에서 체육관까지 가는 길엔 노란 끈과 손수건이 소금바람을 맞으며 나부꼈다.


참사로부터 몇 달이 흘렀고 사람도 그때만큼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엔 자리를 깔고 망연하게 앉아 있는 이들이 꽤 있었다. 형형색색 이부자리들이 모자이크처럼 곳곳에 깔렸다. 시끌시끌한 소리 대신 깊은 침묵이 뻥 뚫린 체육관 건물을 가득 채웠다.


자원봉사자 등록을 하고 체육관 2층 복도에 잠자리를 꾸렸다. 분리수거 임무가 주어졌다.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는 어떤 50대 아저씨랑 매일 세 차례 리어카를 끌며 쓰레기를 모으고,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를 종류별로 나누어 버렸다. 분리수거를 한 번 돌고 나면 나는 누워서 기사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괜히 체육관을 한 바퀴 돌아보곤 했다.


연합뉴스


북적북적하던 기자들은 해산한 지 오래였다. 끈기있는 기자가 남아서 내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가끔 정치인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로비가 시끌시끌해지긴 했다. 그럴 때면 분리수거 아저씨는 관심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불만을 쏟아내셨던 것 같은데 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저씨는 마른 체형에 잔근육이 꽤 붙었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이었으며 과묵한 편이었다. 서로 신상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분리수거할 땐 묵묵히 일만 했다. 쉴 때는 여기 왜 왔어 글쎄요 아저씨는요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가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뭐 이런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슬퍼하는 유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거나, 참사 당일 술 먹던 나를 반성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리어카 끌면서 쓰레기 모아 버리고, 나눠주는 밥이나 컵라면 먹고, 자고, 일어나서 다시 쓰레기 버리고... 어쩌면 난 그냥 그런 허드렛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뭐라도.


사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조용히 떠났다. 같이 일하던 아저씨한테만 말했다. 내가 나는 건 그만 알았을 것이다. 좋은 어른이 돼라,  그런 덕담을 해준  같다. 기왕 온 진도를 떠나기 아쉬워서 무슨 기념관인지 뭔지를 들렀던 것 같긴 한데, 기억에 안 남은 걸 보니 별로 인상적이진 않았나 보다.


3.


2021년 4월, 나는 기자가 돼 있다.


언론을 잘 몰랐고, 그 때문에 언론에 속아서 참사 당일 술이나 마셨고, 다음날부터 언론을 혐오하게 된 내가 어느덧 2년째 기사 쓰면서 밥 벌어먹고 산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 하면 하하 글쎄요, 그러게요, 정도로 답하곤 한다.


세월호와 관련된 경험들이 나를 기자로 만든 건 아니다. 나는 내 삶을 따라갔고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따라왔고 따라갈 내 길 위의 어딘가에 세월호는 분명 무겁게 놓여 있다. 그 배와 관련된 사람들, 그 배와 관련된 이야기들, 사람이 유독 없던 술집과 삐걱대며 굴러가던 리어카 바퀴 같은 것들도.


기울어진 것들을 생각한다. 돈을 더 많이 벌려는 욕심으로 화물을 한계까지 밀어넣은 바람에 기울어져버렸다는 그 배를. 기울어진 건 배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온통 기울어진 것들로 가득하다. 아득한 경사로 위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대단한 저널리즘적 사명감 같은 건 없지만 내가 기사를 쓴다면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하겠다,라고 막연한 다짐만 뿌옇게 쌓아둔다. 바람 불면 흩어질 얕은 다짐이라도, 진도에서 말없이 분리수거하던 그날의 기분으로, 조금씩.


2014년. 사람들은 다시는 어떤 것도 기울어지게 두지 않겠다며 울었다. 2021년. 여전히 곳곳이 기울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한때는 많은 이들이 광장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지금은 아프고 낮은 사람들만 밀실에서 조용히 운다. 함께 우는 일은 점점 어렵고 귀찮은 숙제가 돼 간다.


80년대에 어떤 시인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 한 줄이 요즘 자꾸 떠오르는데, 삶을 살아내다 보면 나도 그렇게 될까봐 가끔 무섭다. 나는 계속 울 수 있을까. 울지 않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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