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아흔애니 : 원래 널 좋아했어 한 곡 반복. 이렇게도 완벽한 터치가 또 있을까. 드라마 OST '원래아흔애니'를 틀어 놓고 가사집에 적힌 단어를 눈으로 따라가며 보고 있다. 집중 듣기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 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를 달팽이관에 꽉 담아 보려 한다. 신경세포를 거쳐 뇌까지 가는 의미 있는 소리들이 거의 없다. 워, 니, 아이, 애, 쓰, 몽, 부, 칸. 8개다.
10개를 채워 볼까 하고 다시 들어본다. 런, 팅. 손가락 10개를 채웠다. 자랑하기도 시무룩해지기도 참 애매하다. 제로가 아닌 게 어딘데. 근데 잘못 알고 있는 단어가 있으면 그건 마이너스인가. 그럼 적어도 마이너스는 아니네.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눈과 귀를 열고 흘려듣기 같은 집중 듣기를 계속 반복한다. 들리는 소리를 따라 눈은 병음 발음을 따라간다.
정말 잘 따라가고만 있다. 생존본능인가. 3~4년 전에 중국어 초급을 배우며 익혔던 기억을 최대한 끌어와 본다. 언어는 역시 꾸준히 해야 하는구나. 배운 적이 없다고 해야겠다. 중국어 선생님에게는 비밀. 차라리 이편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이에게 영어책 집중 듣기만 시키다 내가 하려니 참 이상했다. 역시 단어는 생명수다. 영상을 보며 감성으로 듣는 것과 가사를 보면서 듣는 건 정말 달랐다.
생명수를 위해 쓰다만 벚꽃 표지 노트 하나를 꺼냈다. 노랫말에 있는 단어들을 적고 중국어 사전을 열어 필요한 내용을 채워갔다. 한쪽씩 글자가 채워질수록 뿌듯함이 왔다. 덕질의 좋은 점 하나를 찾았다. 자기 주도 공부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도 한다. 수혈은 중요하니깐. 딸아, 미리 사과한다. 점검 들어간다. 이제 내년에 6학년이 되니 영단어를 좀 응? 알지. 너의 경쟁상대가 엄마는 아니잖니. 딸, 원래아흔애니.
정성 한가득. 벚꽃 노트와 잘 어울리네. 단어 수혈 화이팅.
드라마OST '원래아흔애니'는 사랑하는 여인이 떠난 후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고백노래다. 드라마 속 작곡가인 남자주인공이 오직 그녀만을 위해 그녀에게 답을 해주는 노래다. 남자의 세상은 이미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시각장애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그녀가 빛나 준다면 알 수 없는 꿈도 세상의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다. 오직 그녀만 생각하는 나를 잡아달라는 가슴 아픈 사랑 노래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생각한다. 음, 이런 뜻이었구나. 노래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해석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뜻을 이해하게 해 준다. 노래 가사를 이해하는 건 그 안에 들어있는 인물의 상황,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이 단어 하나하나에 뜨거운 심장을 부여해 준다. 온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면 그때야 비로소 단어는 문장이 되어 사람의 심장을 움직인다. 그럼 내 심장을 움직인 단어는 뭐지. 원래아흔애니(原来我很爱你). 그래 부족한가 보다 사랑이. 부족할만하지. 외롭다니깐. 말해 뭐 해. 방으로 들어가신 짝꿍님. 원래혼자쉰다. 이건 이제 버리자고요. 원래같이쉰다. 먼저 이것부터 하고 나서 이제혼자쉬자 합시다.와, 덕질 좀 한다고 속마음도 이제 막 말하는구나. 속은 시원하다.
얼마 전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배우 탕웨이가 한 인터뷰에서 대사에 나오는 발음만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까지 파고들었다고 한다. 노래 가사 또는 영화 대사는 해석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야지만 공감을 할 수 있고 공감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곱씹고 곱씹어 내 노래, 내 대사가 되면 애정이 생긴다. 애정이 바로 덕질의 시작이다. 덕질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공감과 애정, 덕질은 묶여있다.
작사가 김이나는 ‘보통의 언어’라는 책에서 단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선을 긋다’라는 언어가 주는 냉정함이 오히려 나를 보여주는 단어이며, 너와 좀 더 잘 지내기 위한 표현이라는 생각. 이 보통의 언어는 이제 내겐 보통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치듯 던져버리는 것이 단어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단어는 생각의 시작이며 끝이거나 진행형이다. 배우 탕웨이나 김이나 작사가 역시 단어에 대한 덕질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글자 한 글자 공책에 적다 보니 발음 소리나 뜻이 마음에 드는 가사가 생겼다. 이런 단어는 한참 동안 의미를 곱씹어 본다. 입으로 내뱉어 보고 두 귀로 들어 본다. 역시나 이쁘다. 이 이쁜 단어를 혼자 알고 있기는 너무 아까워 아이에게 소리와 뜻을 말해주기도 한다. 반응은 단답이지 뭐. 응. 어. 그래. 다크 해져가는 딸.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깐. 덕질은 여전히 진행 중. 음, 역시 이쁘다.
우리말에서 한자어로는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해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도 했다. 노래를 듣기만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끔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적고 나서 이 말이 이거라고. 바람 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감정은 나눠야 맛이지. 또 딸에게 말해버렸다. 눈치는 있군. 그동안 내가 한 호응이 있는데. 키운 보람을 호응에서 찾는다. 내게도 덕질하는 단어가 생긴 것이다. 신기하다. 임언준이라는 배우와 노래에 빠져 시작한 덕질은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길이 되었다. 덤으로 엄마에 대한 아이의 달라진 눈빛도 얻었다. 중국어 좀 쓴다 엄마가. 쓰는 게 쉬운 게 아니야. 딸아. 딱딱딱. 획순을 지키면서 알았지. 아직 어느 40대 여성의 덕질하는 하루는 순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