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덕질은 볼륨 업이지

어느 40대 여성의 덕질하는 하루

by 흔적작가


삐-삐-삑삐-삑. 띠리-릭. 현관문을 살짝 당긴다. 운동화를 살살 벗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가로 책장 위에 가사집을 조용히 올려놓는다. 입술이 건조하다. 아직 아무도 없다. 긴장한 어깨에 힘이 빠진다. 크크크. 보기만 해도 좋다. 가방을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놓고 방문으로 걸어가다 멈칫. 3초간 머리가 돌아간다. 주변에 있는 책을 집어 가사집 위에 올려놓는다. 삐-삐-삑삐-삑. “엄마, 엄마.” 아이가 왔다. 순간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어, 왔어?” 건조한 목소리가 갈라졌다. 헉, 뭐 훔친 것도 아니구먼. 왜 얼굴이 뜨겁냐고. 후-후.




불이 나간 현관을 지나 들어오는 아이는 학교에서 또 피구를 했나 보다. 안경은 뿌옇고 지문이 묻어 화려하다. 조잘조잘 혼자 남아 공을 피한 이야기부터 자기는 팀이 3번 바뀌었는데 3번 다 이겼다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어어, 그랬구나. 잘했네. 앗. 너무 건성건성 대답했나. 미안 딸. 네 엄마 지금 정신없다. 이놈의 심장은 왜 아직도 이러냐고. 거실 바닥에 대충 내려놓은 아이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지만 고개를 돌린다. “화장실 가서 손 씻고 세수하고 나와.” “알았어-.” 아이가 씻으러 들어가 있는 동안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간식거리를 찾는다. 그렇지 잘했어 자연스러웠다. 소리 없이 숨을 고른다.




식탁 위에 간식을 올려놓고 보니 너무 조용하다. 잉? 엄마들의 촉. 고개를 돌려보니 화장실은 세상 조용하다. 안방에 문이 열려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타다닥 타다닥 바삐 안방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넘기는 아이의 손. 멈춘 슬리퍼. 망할. 발소리를 들은 아이는 뒤를 돌아보며 “엄마, 이건 뭐야?” 뭐긴 내 산소통이지. “어... 그게. 그러니깐.” 어떻게 말해야 되는 건지. 답답하다. 휴우.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보는 너에게 결국 사실을 고한다. 입꼬리를 힘겹게 올리며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부른 OST인데.......” 하, 말끝은 왜 흐리니. 뭐, 뭐 죄야?




아직 고개를 숙인 아이는 말없이 듣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 단 한 마디인데 머릿속에 수많은 말이 들어온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내 건 내가 지킨.... “... 나도.” 뭐가 너도라는 건지. 이해력이 이렇게나 부족했던가. 아이 눈을 보고 말없이 가만히 있는 나에게 “엄마, 나도 이거랑 똑같이 만들어줘.” 뭘 해달라는 건지. 임언준 사진을 붙인 가사집을 또 만들라는 건가. 왜? 역시 이해력이 떨어진 거다. 그 순간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본다. 저 웃음은 위험하다. “너의 이름은. 만들어 줘. 나도 가사 필요해. 어?” 아, 애니메이션을 말한 거구나.




해버렸다. 가사집 만들기의 어려움과 수고로움을 강조하다 결국 만들어 주기로 약속해버렸다. 또 한 번 이미지를 검색해 표지를 만든다. 일본어 가사와 번역본을 찾아 줄 간격을 맞춘다. 일본어라.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표도 찾아서 넣어본다. 다음날 완성한 너의 이름은 가사집을 아이에게 준다. 아이도 덕질 중이다. 너의 이름은을. 확실한 감탄사가 들려온다. 웃는 얼굴로 나를 안아주며 신나 한다.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찬찬히 살핀다. 앞에 자리 잡은 나도 조용히 내 가사집을 가져와 살핀다.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원래아흔애니 노래를 틀어본다. 적당한 볼륨이 기분을 띄워준다.


고백하자면 조금 대충했다. 그래도 하긴 했다.




순간 이상해진다. 나 지금까지 뭘 한 건지. 별거 없네. 언제부터 이렇게 내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한 건지. 아이는 전혀 관심 없다. 단지 딱 한마디만 했다. 미안하지만 남자 주인공 얼굴이 본인 취향은 아니라고. 허. 순간 열받았다는 건 비밀이다. 조용한 집에 파벌을 만들 수는 없으니. 드라마나 보고 말을 하던지. 나참 어이가 없다. 딸아. 취향 존중 모르니.




적당한 볼륨은 무슨. 블루투스 스피커로 바꾸고 볼륨 업이다. 업.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모르겠다. 뿌듯하게 가사집을 보고 있는데 앞에 있던 아이가 연필을 가지고 오더니 히라가나를 쓰고 있다. 흐뭇. 맞다 언어는 관심에서 시작하는 거지. 나의 노동에 칭찬을 한다. 그때 아이가 나를 급히 부른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비슷한 일본어들을 보여준다. 이걸 어떻게 구분하냐며 놀라 한다. 가, 갸, 거, 겨, 고, 교... 와 같은 이치랄까? 역시 언어는 어렵다. 내 가사집의 언어도 어렵다. 그래도 중국 드라마를 본 기간이 있지. 눈과 귀를 열어본다. 역시 음악은 크게 틀어야 쏙쏙 들어오는 거다.




늦은 저녁. 남편이 들어왔다. 잘 준비를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씻고 나온 남편이 책상 위 자유롭게 펼쳐져 있는 가사집을 보며 물어본다. 이건 뭐야. 서연이 꺼야? 딱 2초 뒤. “아니, 내 거야.” 그렇지, 바로 이거지. 풋. 눈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는 단단하다. 어깨를 으쓱하던 남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무심히 나간다. 이때부터다 우리 집에 원래아흔애니 OST 노래가 울려 퍼진 것이. 덕질은 볼륨 업이지. 암, 그렇고 말고.







사진출처 : 픽사 베이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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