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풀을 찾고 있다. 분명 책상 서랍에 있었는데 왜 안 보이는지. 누가 보면 서랍 정리하는 줄 알겠다. 드디어 서랍 구석에서 딱풀 발견. 뚜껑을 열어보았다. 이걸로는 안되는데. 부드럽게 풀이 퍼져야 하는데. 이 딱풀은 종이를 울게 하는데. 안 되지. 그럼 얼굴이 이상해지잖아. 안돼 안돼. 고개를 완강하게 저어가며 혼잣말을 한다. 아이와 풀칠 놀이를 할 때도 하지 않던 생각이다. 아이에겐 언제나 쿨하게 괜찮아 또 만들면 되지. 일단 있는 것부터 쓰고 하는 거야. 왜 아낄 줄을 모르니. 기분 풀어 이런 일로 그러면 다음에 풀칠 놀이 못하잖아. 이런 얻어맞을 말을 했었다. 딸아 미안하다. 이제와 보니 딱풀이 참 중요한 녀석이었다. 잠깐의 반성을 끝내고 다른 딱풀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작은 소음을 내며 A4 용지를 토해내는 프린터기는 느리지만 충실한 녀석이다. 예쁜 컬러가 촤촤촥 나올 때마다 내 입술은 슬슬슬 올라간다. 칭찬할만하다. 뿌듯하게 프린터기를 쓰다듬고는 뒤를 돌아본다. 곧 뒤쪽 서랍장에서 좀 더 통통하고 덩치가 큰 딱풀님을 모셔왔다. 조심히 뚜껑을 올려보니. 씩. 불투명한 색과 적당한 끈적임을 지니고 있는 새삥님이다. 코에 가까이 가져와 냄새를 맡아보니 공장에서 방금 나온 신선한 풀냄새다. 어깨가 흥분하더니 들썩인다. 난 정상이다. 정상이겠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눈치는 왜 보는지. 그러지 말지.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내 감정에 충실해보자. 아직 연습이 필요하긴 하겠지. 중심에 나를 놓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서 그런 거다. 흠흠. 이제 일 잘하는 프린터기로 관심을 옮긴다. 가사집 표지에 들어갈 사진이 잘 나오고 있다.
역시, 최소한의 여백만을 남기고 사진들을 배치한 나의 센스. 스스로에게 박수를 친다. 드라마 포스터 중 멋진 걸 찾아서 한글파일에 붙여 넣기를 하고 크기를 조절했다. 당연히 OST 노래 영상도 찾아 고르고 골랐다. 정면, 옆모습, 45도. 살짝 들린 턱선과 목선 어쩐다니. 콧날부터 입술선까지 떨어지는 저, 저. 역시 덕질은 이 맛이지. 원래아흔애니의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임언준. 여주인공인 만붕때문에 시작했다가 임언준으로 입덕 한 사람들이 꽤 나있다. 흐뭇. 나만 이런 것이 아니었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이게 뭐라고. 살아있는 감정이 반갑다. 완벽하게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좋다.
음... 뭔가 이상하다. 운동도 하고 있고, 읽고 싶은 읽어야 하는 책도 읽고 있고, 조금씩 새로운 것도 배우고 있는데. 뭐가 다른 건지. 분명 나를 위한 시간인 것은 모두 맞는데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니 어렴풋하게라도 답을 찾았다. 로망.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그것. 바로 로망이 답이었다. 그래 애정의 결이 다른 거다. 적어도 나에게는. 운동, 책, 배움은 앞으로의 삶을 위해 해야 하는 행동들인데 이 덕질은 오로지 떨리는 마음을 위해 하는 것이다. 떨리는 마음. 심장이 2개의 심실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좌심실이 온몸으로 혈액을 내보내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듯 운동, 책, 배움은 삶 자체를 잘 살게 해 끝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럼, 우심실은 무얼까. 폐로 혈액을 내보내는 우심실은 폐가 신선한 공기를 담을 수 있게 해 준다. 신선한 공기 말이다. 떨림이라는 프레쉬한 마음을 주어 가끔씩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덕질이 말이다. 환기를 시켜주는 덕질이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숨은 쉬고 살아야 하니깐. 그것이 무엇이든 덕질 하나쯤은 필요하다. 부끄럽거나 숨길 이유가 없다. 오히려 알려야 하지 않을까.
덕질 좀 하세요. 아이에게 하는 덕질 말고요. 남편에게 하는 덕질 말고요. 온전히 나를 위한 떨리는 마음을 만드세요. 그게 저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에요. 오, 당당해졌다. 좋아. 한 발 더 나가자. 폭풍 검색을 시작한다. 이제는 OST 원래아흔애니의 가사와 가사 해석본이다. 웹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서 딱 내게 원하는 것을 찾았다. 감사의 댓글을 달고 가져온다. 역시 한글 프로그램에 글씨체와 크기를 바꾸고 줄 간격도 다시 맞춘다. 갑자기 남편이 생각난다. 본인 컴퓨터를 어찌나 잘 정리하시는지 폴더가 나란히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집안일을 그렇게 아니, 본인 방을 그렇게 하면 좋을 텐데. 항상 이렇게 생각했는데. 잘못했네. 남편에겐 컴퓨터가 로망인가 보다. 그래 내 로망이 중요하면 남편 로망도 중요한 거지. 로망 찾다가 인내심과 반성, 용서까지 가는구나. 우선 내 덕질이나 잘해야겠다. 가사는 중요하니깐. 타다닥 타다닥. 열심히 가사집을 편집하고 출력 시작. 예쁘게 꾸미고 짠 사진을 찍어 친구한테 전송한다. 역시 덕질은 가사집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