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디스크의 힘
소파에는
빨래 건조기에서
나온
빨래들이
쌓여있다.
어찌할까?
퇴행성 디스크로 이불과 한 몸이 된 지 3주쯤 되었을 때다. 안방에서 주방까지 하루에 2번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걷는 것이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을까. 아랫배에 없는 근육을 끌어모으고 척추를 곧게 펴본다. 주먹진 손을 허리에 받치고 한 발 한 발. 주방 식탁을 한 바퀴 돌아본다. 주방에서 한 참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남편. 거실 책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 평온한 주말의 풍경이다. 내 허리만 빼면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주말 오후 풍경일 텐데.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주방을 점령한 설거지 소리가 점점 길어져 간다. 손이 빠른 남편인데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올라온다.
식탁 주변을 걷는 날 보며 남편과 아이는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고 한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괜찮다고 말해 본다. 식탁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거친 숨소리는 한 톨도 나오진 않지만 허리가 조금 쑤신다. 느린 걸음이지만 저번주 보다 확실히 좋아지고 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식탁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휴. 한 세트를 더 돌아 말아.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서 어설픈 다운독 자세로 시작해 강아지가 바닥에 대자로 엎어지듯 깔린 이불 위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본다. 허리와 무릎이 주는 통증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3주 만에 찾은 거다. 어떻게든 살 궁리는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머리와 몸을 써가며 살려고 궁리를 하다 보면 우유를 치즈로 만든다는 개구리가 될 수 있다. 이불 위에 안착한 몸은 그대로 1시간 휴식. 일단 쉬고 나서 다시 걸어보겠다 다짐을 해 본다. 개구리가 되려니 땀이 좀 난다. 2시간 휴식으로 바꿔도 괜찮겠지.
저녁밥은 카레인가 보다. 점심메뉴와 저녁메뉴가 다르다. 남편 카레는 참을 수 없지. 심지어 룸서비스다. 앉아서 먹기 힘든 나는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먹는다. 참 불편하다. 엎드리거나 옆으로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눌린 위의 불만표출로 머리까지 무겁다. 요가를 다니면서 소화제가 필요 없는 위로 승급되었었는데. 망했다. 소화가 안 된다. 하긴 소화가 잘 되면 더 이상한 거다. 방법은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기. 밥 양 대폭 줄이기다. 음. 확실히 밥양이 줄어서인지. 복부둘레가 줄어들었다. 턱라인도 좀 날렵해졌다. 그래, 퇴행성 디스크로 얻은 것이 하나는 있구나. 근데 먹으면 또 사라질 너희들이겠지. 저녁밥을 먹었으니 저녁 식탁돌기를 또 해야겠다. 불탑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정성을 발바닥에 쏟아봐야겠다. 소원으로 무얼 빌어볼까. 아파 누워있어도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진심 빌어서 이루어진다면야 싹싹 빌 텐데….. 에잇. 하루에 세 번 식탁돌기를 할 수 있는 허리 힘이나 달라고 빌어야겠다. 보너스로 축 거실 걷기 쿠폰도 받고 싶다. 내 발로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게 말이다.
카레밥도 잘 먹었으니 소화를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다시 주방과 거실로 나가본다. 근데 정말 눈감고 야옹을 하고 싶은데 자꾸 눈에 밟히는 무덤이 있다. 소파에 꾸깃꾸깃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저 볼록한 무덤. 건조기에서 나온 지 2주가 넘은 옷은 밑에 깔려 구김의 최고봉을 찍고 있다. 차라리 다시 빨래를 하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 빨래 무덤 정상에는 따뜻한 온기를 품은 옷이 당당하게 깃발을 꽂고 있다. 따뜻함이 주는 온정은 이런 짜증이 아닐 텐데. 온기와 짜증은 참 어울리지 않는데. 왜 같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휴, 일단 모르는 척을 해본다. 그래. 아직 온기가 남아있잖아. 식혀야 제맛인 것도 있는 거야. 구김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안 보인다. 안 보여. 식탁탑이나 돌자. 소원이나 생각하자. 신경 쓰지 말자. 말자… 말자. 망했다. 다리가 저절로 소파 앞에서 멈췄다. 안면 근육도 멈췄다.
주말을 넘기면 4주째다. 온기가 남은 옷은 소파 구석으로 무너뜨리고 도굴꾼이 되어 주름진 못생긴 옷들을 끄집어낸다. 엉켜있는 팔과 다리를 풀며 옷과 옷 사이에 껴있는 양말과 속옷을 분리해 본다. 양말 짝 찾기라는 작지만 귀찮은 도전도 눈앞에 있다. 아, 귀찮은 양말들. 참 손이 많이 간다. 심호흡이 필요하다. 머리를 써야 한다. 허리 때문에 앉지도 못하고 구부리지도 못한다. 소파 등받이에 구출한 옷들을 분류해서 쌓아본다. 헉, 무덤 안에 바구니가 빨래를 품고 있다. 흠, 구김이 더 심한 옷들을 토해낸 바구니가 미워진다. 미운 바구니를 비우고 무채색의 양말과 속옷을 집어넣는다. 엄마야, 벌레다. 내 양말 위에 벌레다. 미치겠다. 후다닥 휴지를 가져와 잡아버린다. 3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벌레 진짜 싫다. 디스크고 모고 모르겠다. 빨래부터 개자. 하다가 정 힘들면 방으로 들어가 요가 매트에 엎어지면 될 일이다. 탁탁탁. 거칠게 빨래를 털어가며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서 빨래를 개어 버렸다. 퇴행성 디스크를 이겨버리는 빨래 개기다.
빨래 끝~. 지친 구호를 외치고 주말 내내 이불 위에서 엎어져 있었다. 척추 위생을 지키기란 참 어렵다. 마음의 위안이 있다면 소파에서 빨래 개기 스킬을 얻었다는 것이다. 스킬을 쌓았으니 이제는 1주일 안에 빨래 무덤은 사라지겠지. 아니, 10일로 해두자. 디스크 환자에게 일주일은 너무 정 없다. 참, 딸아 주말한정 양말과 속옷, 수건 개기 담당은 너란다. 청소기 돌리는 것도 잊지 말거라.
사진출처;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