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디스크의 힘
만족하니?
날 주저앉혔잖아.
카페도, 외식도, 여행도….
그림의 떡이 되었어.
사는 재미를 뺏어갔는데.
만족을 못한다고.
나쁜 놈. 고약한 놈.
에라, 모르겠다. 퇴행성디스크면 아무것도 못하나. 뭐라도 해야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는 속 터져 병날 것 같다. 가장 순수한 욕망덩어리가 되어보는 거다. 결혼에 육아에 빠져 살던 몸을 납치해야겠다. 이제 솔직한 얼굴로 마음에 말을 걸어 보는 거다. 네가 원하는 것이 뭐야. 눈치 보지 말고, 나이 따지지 말고, 뇌를 거치지 말고 말해봐. 원하는 것을 뱉어내봐. 욕망 한 번 탐해보자. 욕망 속에 빠져든다. 빠져든다. 순수한 욕망 속으로 들어가 나에게 말을 걸어 보는 거다. 겁내지 마. 욕심이 아니라 욕망을 탐하는 중이야.
욕망이 이 불행을 멈추게 해 준다면 기꺼이 욕망을 탐할 것이다. 플라톤은 욕망을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결핍. 욕망은 결핍에서 오는 거다. 나쁘고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여. 그림의 떡을 눈앞에 갖다 준 자여. 사는 재미를 뺏은 자여. 여보세요. 어디를 보시나요. 뭐지. 그 표정은. 나 몰라라.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퇴행성 디스크여. 어떻게 해야 통쾌하게 찾아올 수 있을까. 맛있는 떡을 입안 가득 담고 씹어 먹고 싶다. 잃어버린 소소한 일상을 찾고 싶다. 무엇으로 채워야 가능한 일이 될까. 막상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려니 오히려 벽이 생긴 느낌이다. 두 발로 서기, 의자에 앉기, 가볍게 걷고 뛰기. 평소에 의식 없이 하던 행동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욕망에도 제약이 생겨버렸다. 욕망을 욕망답게 쓰지 못하다니. 역시 퇴행성 디스크는 고약한 놈이다.
올라온다. 속에서 삐딱이가 스멀스멀거린다. 욕망답게 쓰지 못한다고 욕망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욕망의 크기를 다르게 하는 것이 실천력을 높이는 방법일 수 있다. 이불 위에 엎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내가. 의자에 20분 이상 같은 자세로 앉아있기 힘든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본다. 니체는 ‘적극적이고 새로운 해석, 그것이 나의 존재를, 그리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태도다.’라고 말했다. 통증이 온다 싶으면 이불과 요가매트 위에 엎어져 있어야 하는 나다. 재료들을 잔뜩 펼쳐놓고 일을 저지를 수가 없다. 감당이 안 된다. 펼치고 정리하고를 어떻게 감당하냐고요. 그래? 그러면 가장 단순하고 깔끔한 재료가 필요해. 아! 아이패드가 있네. 심플은 가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 되기도 한다. 재료의 단순함. 마음에 든다. 좋아. 아이패드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거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해볼까.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중에서 찾자. 익숙한 일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새로움을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영어 필사하기를 하고 있으니. 디지털 영문 캘리를 해볼까. 왠지 있어 보인다. 온라인 클래스에서 영문 캘리그라피를 검색해 본다. 두근두근. 오, 있다. 마음에 딱 드는 수업이 있다. Aisha 작가의 ‘아이패드 모던 영문 캘리그라피 수업. 커리큘럼도 좋다. 기본 모던 영문과 아이패드 드로잉도 배울 수 있다. 오, 소름. 뭐지. 이거 욕망의 크기를 넓혀야 하나. 이때부터 3주간 모던 영문 캘리 수업에 빠져 살았다. 이불 위에 엎드려 애플펜슬을 잡고 a, b, c, d, e, f, g…. A, B, C, D, E, F, G…. 알파벳을 필기체로 쓰는 법을 배우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퇴행성 디스크가 주는 우울증이 뭔가요. 여전히 아프고, 힘들지만 괜찮아요. 몸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고요.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도파민이 지금 뇌를 컬러풀하게 물들이고 있는걸요. 눈치 진짜 빠르시네요. 회색 우울증은 이제 앉을자리가 부족해 잠시 외출 중이에요. 아, 오랜만에 느끼는 통쾌한 기분. 사는 재미가 내게 다시 왔다고 확성기에다 크게 말하고 싶다.
욕망에 빠져 온라인 수업을 끝까지 완강했다. 이제 뭘 할까. 여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은데. 복습을 해야 하는데. 어떤 영어 문장을 써볼까. 또 시작된 행복한 고민. 함께 영어 필사를 하는 분들의 글을 써볼까. 생각했으면 일단 해보는 거다. 오픈단톡방에 올라와 있는 인증 사진을 살펴보면서 적당한 글귀들을 찾아가며 작업을 시작했다. 핸드폰 배경으로 사용할 수 있게 사진도 찾아 넣고, 그 위에 모던 영문 필기체를 써 내려갔다. 작업 속도가 느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완성 작품들을 보니 초보 티가 좀 난다. 괜찮다. 난 초보가 맞으니깐. 근데 또 고민이 시작되었다. 올릴까? 말까? 결국은 눈 질끈 감고 올렸다. 반응이 궁금하신가요? 씨~익.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비상~~~~!!
욕망의 크기가 커지고 있어요.
딥펜과 잉크의 매력에
빠. 졌. 어. 요.
#여러분의 결핍은 무엇인가요?
#어떤 욕망이 가슴에 있나요?
#욕망을 분출해볼까요?
사진출처 : 픽사베이 & 내 폰(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