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가 오면 열리는 일기
[퇴행성 디스크와 함께하는 일상에 대한 짧은 생각과 느낌을 일기로 씁니다.^^]
- 디스크와 세면대
씻어라. 좀 씻으라고. 뇌세포 엄마의 잔소리가 터져버렸다. 잔소리에는 역시 청개구리 심보가 제격이다. 고약한 심보 주머니가 터져 끝까지 베개나 이불을 잡고 버텨내야. 왜 이래요. 나 몰라요. 그 이름도 유명한 청개구리. 이 정도 잔소리로는 날 움직이게 할 수 없어요. 뇌세포 엄마는 날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요. 씻으라고요? 엄마가 맞긴 맞아요. 이렇게 이름값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청개구리가 일부러 씻지 않는 것도 아닌데.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싶다. 허리가 남인가. 뇌세포 엄마는 허리가 남인가 보다. 쳇. 잔소리하기 전에 허리가 지금 얼마나 속상한지. 눈에서 불을 뿜뿜 뿜어내기 전에 마음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청개구리도 물 좋아한다. 씻는 거 좋아한다. 얼굴이 기름기로 덮어있으면 청개구리도 싫다. 정말로 씻고 싶어 진다. 미온수로 손과 얼굴에 물기를 주고 우유향기가 살짝 나는 비누거품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다. 하얀 거품을 두 볼과 이마, 코끝과 턱에 올리고 원을 그리듯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꼼꼼하면서도 혈액순환이 잘 되도록 마사지를 하고 싶다. 맞다. 청개구리도 씻고 싶다. 단지 세면대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순간 찾아오는 허리통증이 기분 나쁠 뿐이다.
허리를 두 손으로 받치고 화장실 세면대 앞까진 갈 수 있다. 허리를 받치던 두 손을 세면대에 올려놓고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세면대를 움켜 잡는 것도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이제 뭐. 훗,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 쉽다. 청개구리가 개굴개굴 가벼운 노래를 부를 정도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이제 허리를 숙여야 한다. 얼굴을 낮춰야 세수를 할 수 있으니깐. 하지만 허리통증이 거부한다. 허리를 숙여 세면대 수도꼭지에게 ‘하이’하고 인사할 수가 없다. 만약 뇌세포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져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서라도 씻을 수는 있다. 있지만 하기 싫다. 뒷수습이 더 힘들고 귀찮다. 얼굴에서 목으로 흐르는 거품과 물. 윽, 생각만 해도 청개구리 볼이 부풀어 오를 상황이다. 수건? 흠, 수건을 목에 두른다고 해도 옷은 젖는다. 아니, 젖지 않아도 싫다. 제대로 씻을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수하다 성격 나빠지기 딱 좋은 자세다.
결국은 어떻게든 얼굴을 세면대 수도꼭지가 있는 위치까지 보내야 하는 미션인 것이다. 아, 참 멀다. 수도꼭지는 왜 아래에 있는 걸까. 수도꼭지를 올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건 다리이다. 최대한 다리를 넓게 벌린다. 요추전만 자세를 유지하면서 엉덩이를 뒤로 뺀다. 쭈우욱. 무릎을 살짝 구부려 본다. 원하는 만큼 무릎을 구부릴 수가 없다. 아랫배에 힘을 주지 않으면 허리에 무리가 온다. 이제 수도꼭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팔뚝을 세면대에 기대는 거다.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를 가리키는 팔뚝에는 살이 많다. 살을 잘 이용하면 뼈가 아프지는 않을 거다. 자세가 불쌍하고 이상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자세는 아니다. 단지 세면대에 기댄 두 팔뚝 중 단 하나도 뗄 수 없을 뿐이다. 떼는 순간 허리통증이 바로 온다. 그러면 그냥 씻다 말고 멈춰야 한다. 휴, 씻을 때도 손보다 얼굴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사람의 손과 팔이 긴 이유가 다 있는 거다.
그런데 세면대는 튼튼한가 모르겠다. 몸 무게를 팔뚝에 실어야 하는데 무너지면 큰일이라. 조금 걱정이 된다. 쓸데없는 걱정일 수 도 있지만 몸이 아프면 별거별거 다 걱정이 된다. 물론 몸 무게가 가벼우면 이런 걱정도 안 하겠지만 말이다. 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빠른 속도로 얼굴에 묻은 비누거품을 씻어내야 한다. 살려면 말이다. 마지막 헹굼을 하고 일어나면 된다. 부드럽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얼굴과 목, 손과 팔뚝에 묻은 물기를 닫으면 된다. 더 이상 뇌세포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되는데.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본다. 에구구구…. 곡소리가 절로 난다. 주먹으로 허리를 툭 툭 툭 치면서 거울을 본다. 음, 뽀얀 피부다. 방금 세수한 촉촉한 뽀얀 피부. 마음에 든다. 잔소리 좀 들었지만 용서해 줄 수 있다. 이제 세면대 수도꼭지와 작별인사를 하면 끝이다. 잘 있어. 며칠 뒤에 보자. 가능하면.
Q. 오늘 괜찮나요?
A. 씻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당분간 청개구리로 살까 봐요. ㅎㅎ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