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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피 Nov 23. 2020

나는 손톱만큼 자란다

토마토소스를 만들며 알게 된 것들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하면 된다’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살다 보면, 어쩌다 ‘해서 되는’ 하나를 얻고 나머지 아흔아홉 개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그것이 세상살이라는 걸 알게 된다. 대게 요리가 그렇다. 하나를 깨치고 나면 나머지 도달하지 못한 아흔아홉 개의 영역들이 쏟아진다. 어쩌면 요리에 인생이 스민다는 말이 이런 이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즈논(Miznon) 메인 소스 중, 이스라엘식 토마토소스가 있다. 이 토마토소스를 우리는 ‘perfume’이라 부르는데 데워진 올리브유향과 구운 마늘, 고추 향이 어우러져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향과 맛이 있는 토마토소스다. 중동식 토마토소스, 흔히 파스타나 라따뚜이(Ratatouille)에 넣어 먹는 토마토소스는 정말 사람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하다. 베즐과 양파 마늘향이 강한 이탈리아식 토마토소스도 있고 이탈리아식 토마토소스 안에서도 해산물을 가열하여 베어 나오는 육즙을 이용해 만든 토마토소스, 뿌리채소를 졸여 만든 토마토소스들, 거기에 지방이 추구하는 향에 따라 재료와 레시피가 다르니 토마토소스는 누가 만드는 가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달라진다.


Miznon's Ratatouille
뜨거운 솥에 올리브유를 끓여 잘게 썬 고추로 향을 내고 다음 편을 낸 마늘을 튀겨 베이스 오일을 만든다. 일정하게 익은 토마토를 선별하여 한 입 크기로 썰어 베이스 오일과 함께 졸여내고 토마토 과즙이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소금으로 간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토마토소스를 거름망으로 한번 거른 뒤 손으로 압력을 가하여 건더기가 없는 순수 용액만 다시 걸러내고 짜기를 반복한다.
이미지 출처 Miznon melbourne 

우리는 늘 마트에 진열된 통조림이나 유리병에 담긴 완성된 토마토소스를 보기에 토마토소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글로 보면 참 간단한데 막상 만들면 그 향이나 맛, 소스의 농도와 윤기 모두 제 각각이라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레스토랑은 안 좋은 레스토랑으로 여긴다. 누가 만들던지 항상 같은 퀄리티의 음식과 그 결과를 내어야 한다고 생각함) 그래서 ‘파퓸 만들기’는 미즈논 셰프들 사이에서도 꽤 난이도 있는 업무로 여겨진다. 나 또한 종종 ‘파퓸 만들기’에서 좌절을 겪었고 주로 실패의 원인으로는 ‘마늘향’을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해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한국인들은 한국 음식에 익숙하기에 마늘향이 굉장히 무딘 편이다. 우리는 마늘과 쑥만 먹고 사람이 된 민족이 아닌가. 나 역시 서른 해를 한국에서 보냈기에 이미 굳게 체내화 된 마늘의 존재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턱이 없다. 나에게 마늘은 채소지만, 그들에게는 마늘은 캐릭터 강한 향신료였다. 마늘을 손톱만큼만 갈아 넣어도 눈을 번쩍 뜨는 이스라엘 셰프들과 내가 쓰는 마늘의 양은 현저히 달랐다. 


어떤 날은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 실패하고, 다른 날은 토마토소스로 쓰기에 적절하게 익은 토마토를 잘못 선별하여 실패하고, 기름의 온도를 잘못 맞추어 실패, 고추의 매운 정도 - 계절과 농장에 따라 고추의 맵기가 달라지기에- 를 나에게 맞추어 실패, 불 세기 조절을 잘 못해서 소스 농도 조절에 실패, 소스를 짜 낼 때 압력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해 실패…


성공한 요리의 이유는 단 한 가지고, 실패의 이유는 여러 가지라는 사실이 꼭 톨스토이의 <안나 카타레나> 첫 문장을 닮았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유명한 소설의 도입부) 인생과 요리가 흡사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이유일까. 실패는 괴로움을 안겨주지만 일은 계속된다. 내가 미즈논의 셰프로 근무하는 이상 '파퓸 만들기'를 피할 수 없다. 달리 어찌할 바도 없이 묵묵히 일을 했다. 매번 결과를 스스로 점검해 보지만 내가 만든 소스가 이스라엘식 토마토소스의 맛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알 수 없는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무념무상식 반복적 노동을 하는 행위는 일종의 수련에 가깝다. 그 노동의 종착지가 어딘지 모른 채, 어쩌면 오래전에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이 사라진채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일지도.


어느 날 해드 셰프 아픽이 내가 만든 토마토소스를 툭 찍어 먹어보더니 뷰티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지는 걸 보았다. 


뷰티풀. 원래 이 말이 이렇게까지 근사한 말이었던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성취란, 이런 모습이었을까. 예상하지 못한 작은 해프닝에 나 스스로가 놀랐고, 그 순간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해드 셰프는 칭찬이 몹시 인색한 사람이었기에, 더 얼떨떨했다. 작정하고 만든 소스가 아니었다. 이미 몸이 자각하는 나보다 먼저 '뷰티풀'에 도달해 있었다. 완성도 높은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과정이 긴 만큼 괴로움도 길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외국인이 고추장을 만드는 건데 그 맛의 깊이를 어떻게 흉내 낼 수 있겠냐고 체념했기에 나 스스로 조차 나에게 거는 기대감이 없었다. 도무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취를 기다리는 괴로움보다 체념하는 편이 덜 외로웠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셰프 커리어지만 요리를 계속해 보겠다는 마음은 아마 여기서 시작된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성취, 움직임은 미약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나의 발전이 내 삶 한 가운데 희열을 던진다. 신철규 시인의 <손톱이 자란다>에서 재미있는 시구절이 있다.


세로로 가늘어지는 고양이의 눈동자
영정 뒤에서도 자라고 있을 손톱
살을 비집고 나온 뼈가 살은 덮는다

잘려나간 손톱만큼 나는 가벼워졌을까
차오르는 눈물만큼 나는 무거워졌을까
기지개를 켠다. 


잘려나간 손톱만큼 나는 가벼워졌을까, 무거워졌을까?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돌아보면 어느덧 성큼성큼 다가 온 존재들 같이. 그렇게 염원하던 일을 집요하게 바라볼땐 좀처럼 나를 향해 움직여 주지 않다가 잠시 잊고 돌아서 눈을 감으면 슬며시 움직여 주는 어떤 존재들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 손톱만큼이지만, 그렇게 성장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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