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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피 Dec 01. 2022

인피니트 디스코

허기를 비트에 갈아 넣어라

#1.  올 더 러버스


“친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친구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레코드 샵에 겁 없이 들어왔다가 무엇을 살지 몰라 주저하는 나를 그가 의아해했다. 나도 내가 잘 고를 줄 알았지, 그래도 내가 호주 와서 꽤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인데 무슨 음악을 즐겨 듣는지 모른다니. 선물을 고른다는 것은 꼭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시험대에 서는 기분을 들게 한다. 특히 음악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라 어쩐지 함부로 발을 들이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LP를 사주고 싶었다. 내가 남을 안다고 해보았자 얼마나 더 잘 알까, 나도 나를 모르는데. 하지만 나이가 들면 여유가 생긴다. 가령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르는 상태’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만족감보다 차근차근 너를 알아가겠다, 라는 상대를 유영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가 꼭 좋아할 음악을 고르진 못하더라도 ‘전한다’는 행위에 더 마음을 두자고 생각했다. 


“마이카, 나 좀 도와줘. 내가 하나 고를 테니 너도 어디가서 하나 골라와.”

화려한 앨범 커버들 사이에서 그가 수수하게 미소 지었다. 종종 노래를 작곡한다는 마이카. 그럼 수도 없이 많은 노래들을 섭렵했을 테고 그가 틀림없이 괜찮은 음반을 가져올 거라는 나의 예상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와 나는 레코드 사이로 각자 흩어졌다가 같은 진열대로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키스하며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진지하게 진열대를 훑는 그의 차분한 눈길. 그러나 빠르게 레코드판을 넘겨가는 그의 하염없이 긴 손가락들. 탁탁 넘겨지는 앨범들 어느 사이에서 그가 멈추면 무엇이 그의 눈에 들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너는 대체 어디에서 멈춘 거니. 

 그러다가 그가 먼 진열대에서 호흡을 다한 해녀처럼 고개를 빼내고 집어 올린 음반을 흔들었다. 다크 펑크. 그즈음 나도 발치에서 익숙한 앨범 커버를 발견했다. 앨범을 보자마자 주옥같은 그의 명곡들이 허밍으로 터져 나왔다. 숨길 수 없는 게이의 소울, 이왕이면 가장 나 같은 걸 선물해보자. 나도 마이카처럼 내가 딴 수확물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들의 뮤즈의 노래를 부르며 달려왔다.


“오 마이 갓 카일리 미노그! 올 더 러버스 댓 해브 곤 비포 (All the lovers, That have gone before)”


#2. 인피니트 디스코


호주에 와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슬픔이 달라지면 위로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슬픔은 싫든좋든 삶을 닮아가기 마련이고 나의 슬픔은 한국과 호주의 슬픔을 반씩 닮았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일터에서 몸과 마음을 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대를 사다가 집에서 조용히 배를 채우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억이 오래오래 남았다. 딱히 순대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아마도 노동 없이 손쉽게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간편함과 언제든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소소한 위안을 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령 이런 일들. 봄이면 달래를 사다가 육회와 비벼먹던 일, 우연히 서점에 들어갔다가 진열된 책들 사이를 거닐고는 뜻하지 않게 좋은 책을 발견했던 일, 목욕탕에 다녀와서 상기된 뺨으로 싱그러운 바람을 맞던 일,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 구절이 몹시 아름답게 느껴지던 일. 그 모든 위로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여기에 왔다는 걸 절감할 때마다 호주는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진다.


나는 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를 때는 막막하다. 열두 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고 먹을 것이 하나 없는 텅 빈 냉장고를 보면 허기보다는 공포감이 다가온다.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는 이곳에서 나조차 나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혼자라는 인생의 실패감이 냉장고의 냉기처럼 싸늘하게 와닿는다. 배고프다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싶은 건 아닌데,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는 음악을 틀어놓고 누워있는 것이 최선인 일이 연속인 나날들이 있었다. 몸을 부지런히 굴려야만 배를 골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 삶을 대하는 철학적 문제를 제쳐두고 결국 먹고살고자 하는 문제로 돌아가야만 할 때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남을 위해 밥을 짓는 사람이지만 먹는 행위를 증오한다. 먹는 일은 지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의 절대적 이치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든다. 맛있는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행위에서 위로를 받고 다시 이어지는 허기에서 불행을 느끼는 세상의 아이러니가 나를 무겁게 한다. 허기가 무섭다. 


밖에 나가 순대를 사 올 순 없는 처지지만 나에게 나를 위로하는 나름의 위안이 있다. 하루를 정리할 음악을 들으며 자는 일. 누구나 음악을 듣지만 모두가 다 듣는 건 아니듯이 나에게 맞는 음악을 찾아 듣고 싶은 말만, 가지고 싶은 그루브만 챙기며 내일 아침에 일어나야 할 나를 위로한다. 네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들. 혹은 알 수 없고 알리가 없는 말들을 디스코가 들려주는 다정한 박자 틈에 흘려보낸다. 카일리 미노그의 디스코는 인피니트(Infinite)라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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