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래된 그림자를 다시 빛으로 바꾸는 과정
중학교 1학년 시절, 여름이면 평소 재봉틀로 옷 만들기를 즐기시던 어머님이 아버님께 시원한 모시 저고리와 바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죠. 문제는 남은 모시로 저희 집 세 남자의 팬티까지 만드신 겁니다. 바람이 숭숭 통하는, 그야말로 '통짜' 팬티였죠. 정말 입기 싫었는데, 아버지의 한 마디에 저희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입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월요일, 저는 체육복을 깜빡하고 등교했습니다. 운동장에 나가 보니, 저처럼 체육복을 안 가져온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죠. 운동장 몇 바퀴는 돌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상과 다른 벌칙이 떨어졌습니다.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은 학생이 너무 많았던 탓에, 체육 선생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며 불호령을 내리신 겁니다.
“야! 너희들 전부 팬티 바람에 저쪽 담벼락에 가서 손들고 서있어!”
'망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하필, 하필이면 그날 모시 팬티를 입었으니. 끝까지 먼 산만 바라보며 바지를 붙들고 버텼지만, "얌마, 넌 왜 안 벗어!" 지시봉이 머리에 '딱!'하고 닿고서야 망설임 속에 바지를 내렸습니다. 이건 말도 글도 필요 없죠. 통풍도 잘 되고 반투명의 모시 '통짜' 팬티, 운동장은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만 빼고요.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수업 중에 창문으로 빼꼼히 보는 놈도 보였죠.
정말, 자존심이 강하기로 철판 같던 저에게 댕댕이 망신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저를 "통팬티!"로 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화도 났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은 제 사춘기 자존심이 입은 상처였습니다. 그때는 아무 일도 아닌 듯 놀리던 친구들에게 욕 한 마디 내뱉고 툭 털어낸 척했지만, 마음속은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기억은 오랫동안 깊은 곳에 상처로 남아 있었죠.
제가 사각팬티를 부담 없이 입기까지는 수십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작은 상처조차도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그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게는 '모시 팬티'로 인한 자존심 상하는 나쁜 기억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오래전, 기억 속에 잠든 '무너진 집' 한 채가 여전히 그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집의 문은 누군가의 매서운 꾸중과 폭력으로 부서졌을 수 있고, 어떤 방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홀로 견뎌야 했던 두려움으로 삐걱거립니다. 누군가에게는 집 밖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는 '오르지 못할 계단'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갑자기 치솟는 불안과 분노가 마루를 뒤흔드는 '지진'처럼 찾아옵니다.
어린 시절 반복적인 체벌이나 꾸중을 받았다면, 지금도 권위적인 사람 앞에서 몸이 움츠러들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혼자 문제를 감당해야 했던 경험은 타인에게 지나치게 기대거나, 혹은 반대로 사람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그림자가 됩니다. 갑작스러운 상실이나 친밀한 관계의 붕괴는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몸에 각인시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반응을 “내가 부족해서 생긴 약점”이라고 자책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린 시절, 무너지는 집을 지키기 위해 지었던 임시 구조물과 같습니다. 그때의 두려움이 아직까지도 당신을 보호하려 애쓰고 있을 뿐이죠.
이제 우리는 그 흔적을 바라보고, 무너진 집을 다시 지을 어른으로서의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안전하게 이해하고, 내면에 숨은 아이를 돌보며, 작은 성공을 쌓아가는 세 가지 단계만으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흉터를 오늘의 강점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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