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행위, 그리고 실천의 윤리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도덕적 과제 가운데 하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오래된 명제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는 일입니다. 이 문장은 종종 이상적인 수사처럼 들리지만, 실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윤리 원칙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존재의 가치와 행위의 책임을 분리해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원칙은 우리의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가장 지키기 어려운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쉽게 한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존재 자체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만일 크고 작은 죄 하나하나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정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문제가 있는 존재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결론에 이르고, 이는 인류사의 끔찍한 만행인 인종 청소와 같은 사고방식에까지 닿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거부하고 미워해야 할 대상은 분명해집니다. 거짓, 불의, 폭력, 착취와 같은 악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의 삶을 왜곡시키고, 관계를 파괴하며,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이 점에서 악한 행위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 전체를 악으로 규정해 버릴 때 시작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단순한 ‘문제의 원인’으로 환원시키고,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모든 인간은 잘못과 무관하게 존엄하며,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확장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은 악을 눈감아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더 정확히 겨냥하기 위해, 사람 전체를 표적으로 삼지 말라는 고도의 윤리적 분별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다만 이 원칙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삶에서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의지보다 먼저, 인지의 전환, 다시 말해 마음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첫째, 한 번의 행동을 그 사람의 '영원한 본질'로 착각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목격하는 순간, 그 행동을 그 사람의 정체성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는 말이 쉽게 튀어나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유독 자주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지만, 과연 누군가를 그렇게 단정할 만큼 우리는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일까요?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악한 행위는 한 사람의 전 존재를 대표하기보다는, 특정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왜곡되어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행위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그 뒤에 놓인 두려움과 결핍, 상처, 혹은 미성숙함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행동은 단호히 거부하되, 사람 자체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언제나 그가 저지른 한 번의 잘못 보다 큽니다. 이 사실만큼은, 우리 자신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분노의 방향을 정확히 조준해야 합니다.
악한 행동 앞에서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문제는 이 분노가 대상을 잃고 사람 전체를 향할 때 발생합니다. 분노가 사람에게 향하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파괴적인 증오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그 증오는 결국 상대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먼저 잠식합니다.
반대로 분노를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불의에 정확히 겨눌 수 있다면, 우리는 정의를 지키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까지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반복하고 강화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혹시 아십니까? 상대를 행위가 아닌 존재 전체로 규정하고, 한 인간을 단일한 낙인으로 환원시키는 방식. 이것이 바로 악의 전형적인 언어입니다. 유대인 학살이나 인종 청소 같은 끔찍한 단어를 합리화시킨 논리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존엄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비판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고, 악이 사용하는 동일한 논리와 폭력적인 단순화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의를 세운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악이 만들어낸 세계관에 갖게 됩니다. 누군가는 완전히 선하고, 누군가는 완전히 악하며, 악한 존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세계관을 그대로 재생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정죄하는 판단이 악과 싸우는 행위가 아니라, 악의 방식에 동조하는 행위가 되는 이유입니다.
셋째, 사랑과 정의가 함께 작동하는 단호한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잘못을 반복해서 용인하거나, 내가 지속적으로 상처받는 상황을 감내하는 것은 결코 성숙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보호와 책임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나는 당신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는 말과 “그러나 이 행동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존재해야 할 말입니다.
이 경계는 보복이 아니라 존엄의 표현입니다. 상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입니다. 더 나아가 이 경계는 상대가 자신의 행위를 직면하고, 책임을 지며, 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돕는 조건이 됩니다.
결국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라”는 원칙은 우리에게 쉬운 선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정한 정의감과 따뜻한 자비를 동시에 유지하라는, 가장 어려운 윤리적 균형을 요구합니다. 악을 분명히 거부하면서도, 인간에 대해서는 끝까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 판단으로 관계를 끝내기보다, 포용으로 변화의 여지를 남기는 태도입니다.
이 원칙이 가르치는 사랑은 감정적인 호의가 아니라, 책임을 감수하는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악은 거부하되,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상처 입은 세상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윤리적 실천이며, 세상에 필요한 가장 강력한 희망의 언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