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들여짐의 대가를 치르는 법
"우리는 언제부터 영혼을 새벽 배송 상자에 함께 포장해 넘기기 시작했나요?"
쿠팡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지금보다 극도로 불행했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조금 더 걸었고, 조금 더 기다렸으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인간적 여유’를 잃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편리함을 ‘절대적 가치’로 숭배하기 시작했습니까?
오늘, 우리 앞에 선 거대 기업은 더 이상 단순한 플랫폼이 아닙니다. 국가의 권위조차 무시하고, 법적 책임을 회피하며,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구조적 권력입니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그 권력의 근원이 국민의 비판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단순하고 이기적인 욕구 ‘빨리, 더 쉽게’라는 유혹이었다는 점입니다.
길들여짐은 독입니다. 혁신이라 찬미하던 편리함이 어느 순간 기본 권리가 되고, 이내 중독으로 변합니다. 기업은 정확히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전 국민을 쿠팡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올려놓은 뒤, “우리가 아니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착각을 심어놓습니다. 그 순간, 기업은 법을 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면 가장 강력한 무기인 대중의 저항이 이미 무기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벽배송에 지불한 것은 멤버십 비용이 아닙니다. 그 대가는 ‘국민으로서의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렀고, 이제 기업은 우리의 침묵 위에 군림합니다.
기업의 탐욕이 국가와 법을 비웃는 순간, 민주주의는 국민의 각성 없이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업이 잘못한 건 알지만, 내일 주문할 게 있어서...”
“나 하나 안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변명은 문제를 악화시키는 촉매일 뿐입니다. 불편함을 회피하는 수많은 소비자는 결국 자신이 감시해야 할 권력을 키워주는 조력자가 됩니다.
오늘의 침묵은 내일의 굴종을 부릅니다. 우리는 기업의 오만함을 비판할 자격조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오만함을 ‘편리함’이라는 명목 하에 승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희생이 아니라 저항입니다.
조금 더 걸어야 하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불편함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파제입니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통제되지 않은 시장 권력, 무책임한 독점, 그리고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의 자존의 붕괴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자 이전에 국민입니다. 소비자는 가격과 속도를 따지지만, 국민은 정의와 공동체를 고려합니다.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편리함의 유혹에 굴복한 순응적 소비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의 가치를 지킬 국민으로 서겠는가.
문 앞의 택배 상자는 단순 배송품이 아니라 선택의 상징입니다. 그 편리함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내주었는지 스스로 묻지 않는 한, 우리는 이미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제는 되찾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힘을, 선택하는 주체성을, 대한국민이라는 이름을.
편리함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도구가 아닌 왕좌에 올려놓는 순간,
편리함은 곧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 노예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