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통계와 문 닫힌 응급실이 말하는 것
커피숍의 조용한 재즈만큼 편안한 오후, 마주 앉아 잡지를 읽고 있던 홍콩인 친구가 물었습니다. 홍콩과 대한민국에는 한 가지 부끄러운 수치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 주는 비극적인 수치입니다. 서로 쓴웃음을 지으며 묵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14,872명, 하루 평균 약 40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9.1명. 압도적인 OECD 1위라는 이 잔인한 숫자는 '노인 빈곤율 1위'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곪아 터진 환부를 증명합니다. 원래 1위란 명예의 상징이어야 하건만, 우리의 1위는 누군가의 절망이 쌓여 만들어진 비극의 금메달입니다.
왜 그들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이들을 붙잡아 줄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상담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성직자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각종 디지털 플랫폼에서도 수많은 이들의 프로필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전공이나 직업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이 안전망을 찾지 않았을까요?
고립된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어디에 있을까요?
국가는 이들의 마지막 호소를 제도적으로 포착하는 데 왜 실패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또 한 가지 비참한 현실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안전망의 허술함은 물리적 생존의 현장인 ‘응급실 뺑뺑이’ 현상으로 고스란히 연결되어 드러납니다. 삶의 의지를 놓으려는 이들을 막지 못하는 사회가, 정작 살고자 하는 이들조차 병원 문턱에서 밀어내는 모순에 직면한 것입니다. 2023년 대구에서 10대 청소년이 여덟 곳의 병원을 전전하다 사망한 사건은 우리 의료 시스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겉으로는 ‘의료진 부족’을 수용 거부의 이유로 들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차가운 ‘책임의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병원이 환자를 거부하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비겁한 회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나쁘면 내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에게 중증 응급 환자는 살려야 할 생명인 동시에, 수억 원의 배상금과 형사 처벌의 위험을 안겨 줄 ‘잠재적 피고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가혹한 법적 환경은 의료진으로 하여금 ‘사명감’보다 ‘자기 보호’를 우선하게 만들며, 결국 약간의 구실만 있어도 환자를 받지 않는 방어적 선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결국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는 책임의 재정의가 절실합니다.
응급실 뺑뺑이는 단순히 병원의 이기심이 만든 결과가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를 오롯이 의료진 개인에게만 전가해 온 사회 구조의 산물입니다. 인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지만,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대가가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 가혹하다면 어느 누구도 선뜻 그 짐을 짊어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화살을 개인의 양심에만 돌리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의료진이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환자에게 달려들 수 있도록 ‘선의의 의료 행위에 대한 면책’을 보장하는 법적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합니다. 또한 병원이 책임 회피라는 구실 뒤로 숨지 않아도 되도록, 국가는 필수 의료 인프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밥그릇 싸움에 매몰된 정치권의 모습은, 주인도 몰라보고 밥그릇을 지키려 으르렁거리는 미망(迷妄)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그 생명을 지켜 주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더 탓하고 싸우며 표를 달라고 외치는 것인지.
그리고 내 일이 아니면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과연 그것이 ‘내 일(My business)’이 아닐까요? 만일 ‘내일(Tomorrow)’ 그 일이 당신에게, 혹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발생한다면 그 ‘내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의사가 환자를 ‘리스크’가 아닌 ‘생명’으로만 대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 사명감을 제도적으로 끝까지 책임져 줄 때, 비로소 구급차 안의 절규와 벼랑 끝의 고립은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이들의 손에 수갑이 아닌 신뢰의 메스를 쥐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응급실 뺑뺑이’라는 비극을 끝내기 위한 우리 사회의 마지막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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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연설 중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단테의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그 의미만큼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times of great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