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여전히 이름 모를 길 위의 이방인이다
낯선 나라에 도착하면, 나는 하루의 시작을 겸허한 의식을 치르듯 도보 여행으로 연다.
지도조차 세밀한 실핏줄을 그려 넣지 못한 어느 작은 도시의 어귀, 그곳이 나의 출발점이다. 목적지 없이 걷는 길에는 정해진 궤적이 없으므로, 내 발길이 멈춰 서는 모든 지점은 비로소 온전한 나의 목적지가 된다.
언제나 그랬다. 나를 감싸는 공기는 내가 살던 곳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밀도와 온기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술 사이로 부서져 나오는 말들은 내가 도무지 해독할 수 없는 낯선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흩어졌고, 상점의 낡은 간판과 행인들의 옷차림은 생소한 문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 낯섦의 한복판에서 나는 문득 마음을 짓누르던 묵직한 족쇄가 풀려나가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길가에 앉아 무심히 손을 흔들며 대화에 몰입한 노인들의 활기찬 모습 속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정감의 결을 읽어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삶의 속내를 짐작하게 하는 원초적이고도 다정한 기쁨이었다.
어떤 이들의 웃음은 도무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더욱 신비로웠다. 그들이 왜 웃는지, 그 유쾌함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그저 그 표정의 잔상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무책임할 만큼 감미로운 평온을 선사한다. 나는 그 무지의 공간 속에서 한낮의 햇살을 머금은 먼지처럼 가볍게 떠다녔다. 그 가벼움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의 본질이었다.
굽이진 골목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얼굴들을 나는 마음의 렌즈로 조용히 인화해 나갔다. 깊게 파인 주름에 깃든 고단의 흔적, 아이의 맑은 눈망울 속에 고인 찰나의 호기심, 연인들이 서로를 응시하며 빚어내는 애틋한 시선까지. 그 헌신적인 표정들은 내 기억의 수첩에 한 페이지씩 소중히 기록되었다.
해의 기울기가 길어지고 어느덧 시골 터미널의 낡은 의자에 앉아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자 낮은 엔진의 진동이 심장까지 전해졌고, 버스는 낯선 도시를 등진 채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온 감각을 곤두세워 탐닉했던 그 생생한 풍경과 표정들이 창밖의 가로등처럼 빠르게 뒤편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주마등(走馬燈).
그 단어 외에는 이 속도감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미소, 골목 끝에서 아련히 풍겨오던 이름 모를 꽃향기,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고독과 희열이 한 편의 짧은 흑백 필름처럼 뒤섞여 머릿속에서 빠르게 되감기 되고 있었다.
버스가 가속을 더할수록 방금 전까지 나의 뜨거운 '현재'였던 것들은 속수무책으로 '과거'라는 서늘한 낙인을 찍힌 채 멀어져 갔다. 우리의 생 또한 이 버스의 궤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가슴을 스쳤다. 우리는 매 순간 생생한 감정의 파도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찰나, 그 모든 환희와 비탄은 형체 없는 잔상이 되어 희미하게 소멸해 버린다. 한때 나를 불태웠던 열망도, 숨이 멎을 듯 시렸던 상처도 결국은 창밖의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가냘픈 불빛에 불과했다.
낯선 도시를 떠나가는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인생이란 결국 이름 모를 길을 걷는 긴 여정이며,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실체 있는 전유물이 아니라, 찰나들이 겹겹이 쌓여 만든 아스라한 기억의 파편뿐이라는 사실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밖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속절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잔상들을 쫓아보려 하지만, 그 빈자리 위로 고달팠던 어느 시절의 회상이 겹겹이 포개진다. 밀려오는 과거의 무게를 피하려 차라리 눈을 감아보아도, 어느새 눈가를 적신 촉촉함이 그 또한 지나간 어제의 일이라며 다정히 흘려보내라 속삭인다.
그렇게 입술을 깨무는 순간, 마음의 깊은 바닥에는 목마른 여행자에게 물 한 잔을 건네던 이름 모를 이의 따스한 미소가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피어올라 어두워진 나를 밝혀준다. 비록 아픈 기억이 스치고 눈물이 고여도, 그 미소 하나만으로 오늘 하루, 아니 나의 지나온 모든 생애는 충분히 여행할 가치가 있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버스는 여전히 어둠을 가르며 달리고 있고,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나를 기다릴 또 다른 '현재'를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렇게 '흑백의 도시'로 돌아오고 있을 거다.
From: Itz Top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