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에서 마주한 짐 진 자들의 눈망울과 창작의 서사
어느덧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서, 오래전 차마고도의 굽이진 길 위에서 만났던 마방의 말들을 떠올린다. 대륙의 뼈대 같은 험준한 고산과 산맥을 타던 그 짐승들의 어깨 위에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마방들의 교역품만이 아니라 세월의 무게가 통째로 얹혀 있었다.
말들은 거친 숨소리만 토해낼 뿐 비명 한 마디 없었다. 그저 고개를 떨구고, 오직 자신의 발밑에 놓인 작은 흙덩이와 돌부리만을 경계하며 목에 걸린 요랑소리와 함께 한 걸음을 뗄 뿐이었다. 그들이 길이 있기에 걷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발굽이 닿는 곳마다 비로소 길이 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숭고한 침묵의 행렬.
그들의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과 초점 잃은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심보다는 벅차오르는 슬픔에 가슴이 메어와 어찌할 수 없는 한숨과 함께 그들의 거친 등을 쓰다듬게 된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끄러운 돌길을 피해 길옆에 나지막이 엎드린 마른풀 사이로 위태롭게 발을 옮기면서도, 마방이 멈추라는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우연히 내 어깨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말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 깊은 눈망울에 가득 맺힌 물기가 눈물인지 빗물인지 가늠할 순 없었지만, 내 눈가에 흐르던 그것은 분명 서러운 눈물이었다. 짐을 진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얼마나 꾸준히 걷고 있는가?"
우리가 살아내는 '꾸준함'이라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가 자신의 발목에 채운 눈부신 족쇄와 같다. 무엇인가를 이루겠노라 다짐하며 첫 문장을 쓰거나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쇠사슬을 부여잡게 된다. 수고한 만큼의 보상이 따르고 땀 흘린 만큼의 보람이 계절의 순리처럼 돌아오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시린 겨울바람처럼 냉혹하기만 하다. 공들여 쌓은 탑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창작의 산실에서 잉태한 열매가 빛을 보지 못한 채 사그라들 때, 우리의 무릎은 꺾이고 기운은 남김없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마주하는 지극히 투명한 슬픔일 뿐이다.
특히 '창작'이라는 고독한 형벌은 더욱 그러하다. 무(無)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성(城)을 짓는 일은,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차마고도의 밤을 홀로 건너는 마방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결실은 멀고 길은 끝이 보이지 않으며, 뒤를 돌아보아도 지나온 발자국은 금세 눈에 덮여 사라진다. 그 막막함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그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밑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뿐이다.
오르막의 가파른 숨 가쁨도, 내리막의 위태로운 쏠림도 그저 담담히 받아내며 꾸준히 가다 보면, 거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쉼터가 불현듯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목적지에 닿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고, 그곳이 우리의 최종 안식처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연말의 찬 공기 속에서 나는 다시금 다짐한다. 꾸준함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 나를 새로이 설득해야 하는 '용기의 증명'이라는 것을. 화려한 불꽃놀이 같은 단발적인 성취보다, 어둠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며 타오르는 등불 같은 그 묵묵함에 마음을 기댄다.
오늘도 우리는 바닥을 본다. 먼 곳의 신기루를 쫓기보다, 내 발끝이 닿는 차가운 대지의 감촉을 느끼며 다시 한 걸음을 밀어낸다. 그 지독한 꾸준함이 비록 당장의 기적을 불러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이 거대한 삶의 서사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는 가장 단단한 밧줄이 되어줄 것임을 나는 믿는다.
이 겨울, 묵묵히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의 어깨 위에 고요하고 따스한 축복이 내리길.
From: Itz Top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