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온기를 채우는 시간
“설날엔 꼭 한복을 입어야 하나?”
어린 시절의 설날, 제게 조금은 어색한 질문으로 시작되곤 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이었을까요, 사촌 누이의 친구 중에 정말 눈부시게 예쁜 아이가 있었습니다. 유명 제과회사에서 뽑는 ‘미스 *데’에 입상할 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졌던 그 아이는, 어느 해 설날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기억 속 여성 한복의 ‘표준 모델’로 남아있을 만큼 아름다웠던 그 아이가 제게 툭 던진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오빤 왜 한복 안 입어?”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건, 아마도 남자 한복 특유의 느낌이 제게는 낯설었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제게 늘 단정한 양복 스타일의 옷만 입히셨고, 덕분에 설날만 되면 저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물론 어른들에게조차 늘 ‘애어른’ 같다는 소리를 듣곤 했지요. 그 낯선 옷차림만큼이나 제게 설날은 조금은 서먹하면서도 거추장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사실 '설날'이라는 이름의 뿌리 자체가 바로 이 '낯설다'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날', 즉 '낯선 날'이라는 뜻이지요. 이 예쁜 이름 속에는 새해라는 미지의 시간 앞에 선 우리 조상들의 경건하고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새해를 그저 떠들썩한 축제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직 낯설 생소한 시간을 대하듯,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하며 한 해를 시작했답니다. 낯선 길을 처음 걷는 아이처럼 설레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 그 '낯섦'을 우리는 가족이라는 따스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녹여내며 비로소 새로운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설날 아침, 집안의 풍경을 가장 먼저 바꾸는 것은 단연 '한복'입니다. 제게는 조금 서먹했던 옷이었지만, 조금은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고운 옷을 차려입는 일은 우리에게 찾아온 새로운 시간을 정중하게 대접하겠다는 약속과도 같습니다.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를 입고 거울 앞에서 쑥스럽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보석 같았습니다. 그 고운 빛깔을 보고 있으면 어른들은 가슴 한편에 묻어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고, 아이들은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좋은 마법에 걸리곤 합니다.
이윽고 이어지는 정겨운 세배 시간,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정성껏 모아 절을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맑은 인사 뒤에 건네지는 어른들의 덕담과 세뱃돈은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그 봉투 안에 담긴 진짜 보물은 따로 있습니다. "네가 걷게 될 새로운 한 해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단다"라는 어른들의 든든한 사랑과, 서먹했던 친척들 사이를 단숨에 이어주는 다정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물론, 세뱃돈의 액수에 따라 그날의 기억이 조금 더 두툼하게 남기도 했지만요.
설날의 백미인 떡국을 준비하던 추억은 또 얼마나 따뜻한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을 아직 식기 전에 조청에 푹 찍어 먹던 그 맛은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말랑한 떡이 적당히 굳기를 기다렸다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떡을 썰던 풍경도 눈에 선합니다. 엽전 모양을 닮으라며 비스듬히 떡을 써는 손길마다 풍요로운 한 해를 바라는 소망이 촘촘히 박힙니다.
굳은 떡을 써느라 손가락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면서도, 곁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쫄깃한 떡 조각을 쏙 넣어주던 그 정겨운 웃음소리. 그것이 바로 떡국 한 그릇에 담긴 가장 비밀스럽고 맛있는 양념이었을 겁니다. 하얀 떡국을 나누며 "이제 진짜 한 살 더 먹었네"라고 주고받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든든한 가족임을 다시금 확인하곤 했습니다.
설날이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날'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아직 서로에게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게 서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둘러앉아 따뜻한 덕담을 나누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 함께 나눈 후 따뜻한 아랫목에서 윷놀이 한 판을 벌이다 보면 어느새 다시 배가 고파집니다. 그때 설날에만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정성 어린 음식들을 다시 나누다 보면, 새해라는 낯섦은 어느새 포근한 온기로 바뀝니다.
어쩌면 '설날'의 진정한 묘미는 이런 예쁜 말장난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시간이 그저 '낯설기'만 해서 '설날'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오늘부터는 이 날을 '내 마음이 당신에게 건너가 설레는 날', 즉 '설(레는) 날'이라 불러보면 어떨까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익숙함에 속아 소홀했던 마음을 다시 정리하고, 그 기분 좋은 떨림으로 서로를 마주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봄볕 아래 꽃이 피듯 더욱 끈끈하고 화사해질 겁니다. 낯선 시작을 눈부신 설렘으로 바꾸는 마법,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온 설날의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