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쓰고 달콤한 그 맛의 정체

by Itz토퍼


사십 대 중반, 홍콩에서 일 년 동안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장으로 베트남에 다녀온 지 일주일 만이었지만, 다시 시작된 비염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또 이어졌습니다. 홍콩의 습한 공기는 여전히 버겁습니다. 침사추이에서 밤을 맞이한 지도 몇 달이 흘렀지만, 아직은 이곳의 공기와 리듬에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 커피를 내리기로 했죠. 문득 하노이에서 마셨던, 유독 쓴맛이 강했던 그 커피가 그리워졌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연유를 듬뿍 넣어 달콤하게 마시죠. 평소엔 즐기지 않던 단맛이지만, 쓴맛과 어우러져 남기는 묘한 여운이 있었답니다.


그 맛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어느새 나의 새벽 속에도 스며들었죠. 사십 대는 아직 청춘이라 여겼는데, 습한 공기 앞에서는 장사가 없나 봅니다. 밤새 틀어놓은 에어컨 탓도 있겠지요. 결국 이렇게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야 숨통이 트입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드립포트에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이 시간에 마시는 따뜻한 드립커피는 오늘도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증거가 되어 주었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의 수많은 순간들은 커피 원두와도 같습니다. 그 속에는 쓴맛과 신맛, 그리고 단맛이 고루 섞여 있지요.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새벽의 김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커피를 내리는 일은, 어쩌면 기억을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원두를 갈아내는 순간,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억눌린 껍질이 부서지고 향이 퍼져 나올 때, 그 부서지는 소음이 새벽 방 안을 울립니다. 잘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향이 천천히 퍼져갈 때, 뇌리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불시에 깨어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날은, 실수로 커피를 하얀 노트 위에 쏟아버렸습니다.


커피가 번져 내려가던 그 짧은 순간, 시야가 한 색에 고정되고,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듯하더니, 어느새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기억이 되감기며, 어느 날의 한 장면 위로 떨어졌습니다.




일요일 오후 세 시.


앵두가 커피색 가죽표지가 덮인 다이어리 한 권을 내밉니다.


“니 글 쓸 줄 아나? 시 같은 거 잘 쓴다던데, 내 위해서 시 하나 지어줄래? 나도 글 쓰는 거 좋아하거든. 니는 국민학교 때 상도 받았다며.”


왠지 남자아이가 글을 쓴다는 게 창피했던 저는,

“지금? 빵 묵다가 무슨 시고. 나중에 생각나면 써줄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노트를 돌려주었습니다.


하얀 노트는 어느새 커피색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잔 속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처럼, 어린 날의 기억이 돌아와 미안함과 아픔으로 다시 차오릅니다.


차라리, 그때 커피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그 노트를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향기만으로 만족하며, 그 기억을 바람에 맡겨버렸다면...



“우리 아부지는 커피 엄청 좋아하는데, 술 묵고 들어와서 꼭 커피부터 마시더라.

아~들은 커피 마시몬 머리 나빠진다 하면서, 나중에 커서 마시라 하더라.”


“인자 한 달만 있으몬 대학생 아이가. 니 서울 가몬 내가 가서 맛있는 커피 사주께.”


그래서였군요. 누군가와 처음으로 커피 이야기를 나눈 것도, 바로 그녀였습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아버지의 커피 향만 또렷이 기억나고, 그녀의 얼굴은 희미해졌는지.


딱딱한 껍질이 부서지고 갈리는 순간, 아픔은 잊은 채 향기로만 내게 다가왔던 이유. 매일 아침 목을 타고 내려가던 그 쓰고 달콤한 맛의 정체가, 결국 내 심장 깊은 곳에 묻어둔 이름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뒤,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친구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소식이 담겨 있다는 걸 알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다시 짚어 내려갔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방안을 서성이다가, 이내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세상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공기는 싸늘했습니다.


손에 쥔 편지는 눈물에 젖어 잉크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저 달렸습니다. 달리면 달릴수록 기억이 씻겨나갈 줄 알았죠. 하지만 달리고 또 달려도, 번져버린 글씨처럼 마음속의 문장들은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새벽, 공터에 홀로 서서 숨을 몰아쉬며 깨달았습니다.

잊으려 달렸던 그 시간조차, 결국은 그녀를 잊지 못한 증거였다는 걸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내 노트엔 그녀에게 주지 못한 글과 시가 그토록 많았는데.


후회가 됩니다. 마음이 아프고, 또 아파옵니다.

그 아픔이 쌓이며 또 눈물을 밀어냅니다.


그리움이란, 시간이 지나면 옅어져야 하는데...

왜 그토록 짙은 걸까요.



침사추이의 새벽, 커피 향이 여전히 방 안을 채우고 있습니다.

내일도 커피를 내리며 잊히지 않는 이 마음을 불러내야 할까요.

아니면, 어쩌면 다시 커피를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향기가 또다시 기억의 수렁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같은 고통을 반복하게 만들 테니까요.


차라리, 오늘만이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미안해.

정말, 미안해.







IMG_3443.jpg
앵두꽃은 매년 4월 중순에서 5월이면 이렇게 피어납니다.
이전 02화크림빵과 일요일 세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