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에 뭐가 있노?

캠퍼스 청춘의 우정 쌓기

by Itz토퍼


지금부터 조금은 까마득한 시절, 70년대가 저물고 80년대가 떠오르던 그때의 대학 캠퍼스.


열정과 분노, 그리고 낭만이 뒤섞여 있던 시절이었죠. 마치 동동주에 사이다를 탄 듯, 톡 쏘고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시대였습니다. 군사독재와 시위의 시절, 청춘들의 선택지는 세 갈래였죠. 도서관이냐, 시위 현장이냐, 아니면 방관이냐.


그 시절엔 어두운 그림자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곤 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부터 이어진 억압과 독재의 문화 속에, 삼청교육대와 강제징집 같은 이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갈등과 분노가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려 있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청춘의 격정기를 보내고, 특공연대의 비애를 안은 채 제대를 하고 어렵게 복학했습니다. 다시 낭만의 캠퍼스로 돌아와 복사꽃 같은 대학생활을 이어갔죠.


학생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경계, 또 하나는 절대 환영.


다행히 복학생으로서의 두 번째 캠퍼스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이제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도 없어서인지, 아니면 제가 좀 잘나고 똑똑해서인지, 여학생 후배들이 제법 따랐습니다. 착각은 늙으면 더 자유라고 하니, 일단 패스.



청춘들에게는 늘 하나의 과제가 있죠. 바로 ‘사랑과 우정 사이’입니다.


이성 간의 관계에서 그 사이는 애매하면서도 얄궂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술 한 잔 들어가면 그 경계는 더욱 희미해지고, 모호해지죠.


“손만 잡고 자자”?

거짓말입니다. 그랬다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죠.


손만 잡고 잔다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말.


“니가 와 내 팬티 입고 있노~!?”


진정한 친구 사이는 처음부터 그럴 일 없고, 행여 있다 해도 각방을 쓰거나, 호주머니 사정에 따라 하늘과 별을 이불 삼을지언정 손잡을 일 없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주말이 되면, 늘 동기들과 함께 가까운 학교 근처나 교통이 편한 낙원동으로 몰려갔습니다. 동동주 한 사발에 부침개, 그리고 얼큰한 섞어찌개.


그게 당시 대학생들의 ‘낭만 풀코스’였죠. 호주머니 사정도 시원찮았고 마땅히 놀 곳도 많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의 나이트클럽이라 해봐야 낙원상가 근처의 저렴한 ‘미드나이트 클럽’ 몇 군데가 전부였죠. 돈이 좀 있는 친구들은 강남 쪽으로 갔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우리 같은 학생들에겐, 값싸고 오래 앉아 놀 수 있는 동동주집이 최고였습니다.


그날도 여럿이 어울려 앉아 시국 이야기, 학교생활, 그리고 앞날에 대한 걱정까지,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었죠.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한 녀석이 갑자기 토를 하더니 그대로 뻗어버린 겁니다.


저보다 두 살 어린 친구였는데, 외동딸이라 그런지 복학생 선배들에게도 ‘형’ 대신 늘 ‘오빠’라고 불렀죠. 문제는 그 녀석을 어떻게 집으로 데려다주느냐였습니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왔고, 각자 집 방향이 달라 다들 곤란해했죠.


결국 결론은 하나, 짐은 ‘짐’에게.


여자친구가 함께 가려 했지만 그녀는 마포, 문제의 주인공은 천호동, 저는 한남동.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저 혼자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십시일반 택시비를 모아 제 손에 쥐어주고는 순식간에 집으로. 그런데 이게 또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녀석의 키가 저와 비슷한 장대였거든요. 무게도 만만치 않았고요. 하필이면 그날따라 치마를 입고 나와서는!


결국 확인 들어갑니다.


"니거집 택시에서 내리몬 가깝나?”


“5분.”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이었습니다.


제대 후 첫 PT 훈련이었습니다. 말이 5층이지, 그 무게를 짊어지니 어찌나 높아졌는지. 유격장에서 레펠 타기 훈련하려고 오르던 암벽보다 더 높은 느낌이었죠.


그렇게 간신히 그녀의 집 문 앞에 도착해 노크를 하니, 아버님이 나오셨습니다. 표정은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저라면 일단 죽빵부터 날렸을 텐데, 그분은 담담히 말씀하셨죠.


“아이고~ 문디 가시나!”

“욕봤다, 어서 들어온나.”


낯익은 경상도 사투리. 순간 뭔가 통하는 느낌. 그렇게 방까지 부축해 들어가자 어머님께서 이부자리를 깔아주셨습니다. 솔직히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살포시 내려줬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부모님께서 평소 제 이야기를 종종 들으셨고 엠티 사진에서도 얼굴을 보신 적이 있더군요.


“왠지?”


“고맙데이, 수고했다. 어디 사노?

한남동!? 택시가 있을라나 모르겠다.”


그리곤 택시비까지 챙겨주시면서,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 한 잔을 따라주셨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제 입에서도 꼬리꼬리 동동주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 시절 천호동은 거의 허허벌판이었거든요.

택시요? 그런 건 없습니다.

결국 천호동에서 한남동까지 도보 행군.


그날 제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 위에서 혜은이의 ‘제3한강교’를 얼마나 열창했는지 모릅니다. 셀프 앙코르도 수십 번은 했을 겁니다. 누가 보면, 딱 미친놈이었죠. 그렇게 이태원 고개 위 하숙집까지, 외롭지만 묘하게 뿌듯한 발걸음이 이어졌답니다.


그날 밤, 아니 다음 날 새벽, 방바닥에 그냥 퍼져서 생각했습니다.


나를 혼자 보낸 친구들, 그 상황을 믿고 맡긴 여자친구,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그녀의 부모님. 무엇보다, 5층 계단을 오르는 제 등에서 아기처럼 잠들어 있던 그녀.


그 모든 것은 신뢰보다 더 가까운 이름, ‘믿음’이었습니다. 사랑과 우정의 경계는 멀리 있지 않더군요. 그 갈림길의 가운데 이름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에서는 필요도 없는 ‘고마움’이, 우정에는 있다는 걸요.



다음 주 월요일, 강의 도중에 쪽지 한 장이 전해졌습니다.


“오빠, 토요일 날 미안했어. 정말 고마웠어.

다시는 그렇게 술 안 마실게.

점심때 학과 사무실 앞에서 기다릴게.

내가 짬뽕 쏠게. 00이랑 꼭 같이 와.”



그런데 며칠 후, 그녀는 다시 떡실신이 되었습니다.


“와!!! 또 와이라노!?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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