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자폐래요 08

(25.11.14)

by 우리 아빠

'자폐'라는 말은 어감이 참 거칠고 투박한 것 같다.

'장애'라는 말 역시, 가뜩이나 울렁이는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망쳐놓는다.


그래서 난 이 두 가지 단어를 잊어보겠다.

정확히는, 바꿔보려 한다.


우리 딸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래요.


아니,


우리 딸은 '사회적 작용과 소통에 선천적 힘듦을 가지고 있는 아이'.


어엿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여러 성장통을 겪는

세상에 모든 아이들, 보통의 사람들처럼

우리 딸에게도 그저 그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너무 말이 장황한가...

그래도 틀린 말은 단 한 구절도 없지 않나.


그래서 그저 관찰하고 문제를 인식해,

우리 아기의 미래를 있는 힘껏 열어주고 싶다.

평범하게.


일단 지금 떠오르는 우리 아기의 모습들을 정리해 본다.


1. 말이 조금씩 늘고 있다.


말문이 늦게 트이긴 했지만, 우리 아기는 '무발화'로 조금 더 중증인 아이들보다는 나은 상황인 것 같다.

알고 있는 단어도 어림잡아 100개는 넘어 보이고,

웬만한 낱말 카드의 단어들은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할 수 있다.


본인이 원하는 것들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다.


"oo 먹고 싶어." (oo는 포도, 블루베리, 간식, 밥 등 다양하게 말한다.)

"드디어 아빠가 왔어요! 아빠 왔어!"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어부바 해줘", "아파트 놀이터 가고 싶어." "말 타고 싶어.",

"할아버지랑 놀고 싶어.", "실내 놀이터.", "교회 갈래요.", "할아버지랑 공 뻥!",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 "여보, 포도 주세요."


등등...


다만 반향어가 있는게 걱정이다.

엄마, 아빠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고

세이펜 및 엄빠의 다독으로 외우게 된 '베베' 동화책들을 몇 권씩 줄줄 외운다.

(맥락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아 지연 반향어인 듯하다.)


2. 상호작용이 잘 되는 편이다.


같이 손을 맞잡고 '쎄쎄쎄'도 가능하고, 역할을 바꾸진 못하지만 숨바꼭질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할아버지와는 순서를 번갈아 공을 뻥 차며 놀 수 있고,

청진기를 낀 채 아빠의 몸에 대고 의사 흉내를 내기도 한다.


"우리 아기 어디갔지?"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면,

혼자서 방에 들어갔다가 나를 향해 "아빠!"하면서 우다다 달려와 안기기도 한다.


눈 맞춤도 잘 되고 (발달센터 선생님들도 같은 의견이다.)

길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잘하는 편이다.


다만 호명 반응은 10번중 2~3번 정도의 낮은 성공률을 보인다.

(아기가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땐 성공률은 더 낮아진다.)


3.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우리 아기.


우리 아기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은 감각이 예민해

기본적인 생리 현상들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딸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건강의 기본적인 3요소가 모두 훌륭하다.

먹기도 잘 먹고 (다만 편식이 조금 있다.) 통잠도 수월하며

소변, 대변도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

.

.

아직은 내가 온전히 우리 아기의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우리 아기의 요즘을 정리해 보려고 마음먹은 내용들에,

알게 모르게 묻어 있는 나의 희망들과 붙잡고 싶은 밝은 미래가 잔뜩인 걸 보면...


내일부턴 조금 더 문제적인 면들을 용기를 내어 살피고 마주해야겠다.

마음은 쓰리고 아파도 결국은 그게 '우리'를 위하는 길일 테니까.


우리 딸의 어려움을 알게 된 후

꾸준히 적으리라 마음먹은 일기장.

감정을 추스르고 곧게 잡은 마음으로

우리 아기의 매일을 적고자 한다.


'자폐', '장애?'


아니,


'우리 아기의 성장을 가로막는 어려움.'


그것을 지켜보고 해결해주는 시간들,

그리고 이 결심을 꾸준히 다짐하는 글들이

이 일기에 오래도록 담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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