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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는 우리집

암흑

by 직진언니 Mar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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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밖에서 다른 경제활동은 하지 않고 집안 일과 오빠와 나의 교육에만 전념하셨다. 매일 아침 새로 지은 밥을 먹기 좋은 온도로 식을 수 있게 창가에서 식히고, 그렇게 정성 들여 준비한 밥과 반찬을 차려주셨다. 방과 후엔 간식과 맛있는 저녁이 언제나 오빠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아빠의 술주정으로 시작된 부모님의 이혼으로 이제는 더 이상 집에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텅 빈 집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반찬을 꺼내어 먹었다. 이내 엄마의 반찬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 아빠는 어떤 아주머니를 집에 데리고 오셨다. 아마도 아빠의 여자친구였던 것 같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오빠와 나에게 음식을 해주셨다. 캔 옥수수가 들어간 동그랑땡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음식 솜씨가 꽤 좋으신 분이었다. 몇 주가 흘렀을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주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보통이 아닌 아빠의 성격을 맞추기 어려우셨는지 동그랑땡 추억만 남기고 떠나셨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감자조림은 어떻게 하는 거야?"

"감자조림하려고? 처음 하면 어려울 텐데 엄마가 얘기하는 거 메모해 봐."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로 감자조림을 만들어봤다. 정말 맛이 형편없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셨을 때는 짭조름 달콤한 게 윤기가 돌며 정말 맛있었는데, 내가 만든 감자조림은 엉망이었다. 


반찬뿐 아니라 엄마의 빈자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엄마가 계셨을 때에는 아빠의 술주정을 엄마 혼자 온전히 감당하셨던 날이 부지기 수로 많았다. 이제는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그 화살이 오빠에게 돌아갔다. 차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 시기에 고등학생이었던 오빠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암흑 같은 나날을 지내던 중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대문 시장 근처에서 잠시 엄마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반갑기만 했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두고 나가셨지만 난 한 번도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경제력이 없으니 엄마가 양육권을 갖기도 불가능했다.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신 것을 안다. 


엄마는 나에게 핑크색 밴드가 끼워진 시계를 선물로 사주셨다. 나는 예쁜 시계를 손목에 차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에게 손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았다. 엄마는 혼자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아직도 그때 엄마의 모습이 내 기억에 선명하다. 








아빠와 지내는 하루하루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술을 드시고 오시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엄마가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을까, 아빠는 서울에 있는 집, 직장,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셨다. 오빠와 나는 학교를 핑계로 서울에서 지내기로 했다. 드디어 아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빠와 살던 집을 나와 엄마에게로 갔다. 그동안 엄마는 단독 주택에 딸린 문간방에서 살고 계셨다. 학교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우리 셋은 그곳에서 몇 달간 지냈다. 


아빠와 같이 살던 집에 있던 공주방 같은 내 방 보다 엄마와 오빠, 내가 셋이 옹기종기 지내야 했던 단칸방이 오히려 더 좋았다.  엄마가 없었던 넓은 아파트 보다, 엄마가 있는 단칸방에서 비로소 평화로울 수 있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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