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아빠! 아빠! 어디가? 가지 마!'
아빠는 늦은 저녁 집안 불을 다 끄고 문밖으로 나가셨다. 그런 아빠를 쫓아 뛰어나갔다. 아빠는 빈속에 1000ml 흰 우유를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켜고 계셨다. 짠 한 마음에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슬픔이 느껴졌다.
'아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빠, 사랑해!'
순간 흐느끼며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이렇게까지 현실처럼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한 슬픔이 꿈에서 현실로 이어져 번쩍 눈을 뜬 순간에도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걸까? 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아빠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꿈이었을까?
꿈에서 아빠를 만나기 얼마 전 친구와 함께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었다. 이런저런 현재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상담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쯤 질문을 받았다.
"아빠는?"
"아빠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많이 외롭게 아파하시다가 돌아가셨네. 아빠가 00한테 많이 미안하대.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원해주지 못해서."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었다. 외롭고 아프셨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아니 내색조차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렇다. 그런데 영매를 통해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상상조차 해보지 못 한 순간이었다.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빠는 술에 취해 계셨고 나는 그런 아빠에게 마구 화를 쏟아냈다. 언제까지 이런 술주정을 받아줘야 하나 갑갑한 마음에 엄청난 분노감을 건강 관리에 소홀함을 탓하는 포장지를 씌워 아빠에게 쏘아댔다. 나는 전화를 끊고 씩씩거리며 화장실에 있는 바가지를 발로 찼다. 아빠의 부재중 전화가 두 번 와있었지만 다시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빠와의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다시 전화를 드려서 화해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빠와 나의 마지막 대화는 술주정과 분노로 막을 내렸다.
다음날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현실적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아빠에게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아빠의 영정사진이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을 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입관식에서야 아빠의 죽음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다. 말끔하게 수의를 차려입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누워있는 아빠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아빠 미안해. 사랑해. 미안해. 사랑해..."
몇 번씩 소리 내어 외쳐도 부족했다. 왜 살아생전 이렇게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아빠의 짐을 하나씩 정리했다. 빨랫감을 모아둔 곳에 내가 사드린 플리스 조끼가 놓여있었다. 최근까지도 조끼를 잘 입고 계셨구나. 따뜻하게 주무시라고 사다 드린 겨울 이불은 아직 계절을 맞이하지 못한 채 장롱 안에 곱게 개어져 있었다. 책 몇 권, 장롱을 반 정도 채우는 옷 몇 가지, 오래된 것 같은 반찬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이 채워진 냉장고, 사용한 지 오래된 것 같은 전기밥솥, 쓸쓸한 아빠의 일상을 정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일간의 장례식, 며칠 간의 유품 정리. 한 인간이 몇십 년을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정리하는 데는 단 일주일 정도의 시간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똑같이 흘러갔다.
내 세상만이 달라졌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별이 되었다. 나를 지탱해 준 뿌리가 반쯤 죽은 느낌이 들었다. 아빠는 죽음의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꿈에서 잘 차려진 따뜻한 밥상이 아닌 흰 우유를 빈 속에 들이키는 아빠는 그렇게 가까스로 인생을 살아가셨던 것일까. 미혼으로서 나 하나만 지켜내는 나의 삶도 이렇게 불안하고 힘겨운데 아빠는 그 세월을 혼자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과연 인생은 무엇일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스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빠의 죽음은 나에게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천사들의 제국'에서 천사는 3명의 의뢰인의 수호천사가 된다. 그리고 천사들이 의뢰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은 직감, 꿈, 징표, 영매, 고양이,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소설에 흠뻑 취해있었던 것일까? 영매와의 일이 있은 후 꿈을 통해 아빠와 마주하게 되니 천사들의 제국 소설 속 이야기가 마치 현실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수호천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빠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혼자 외롭게 두어서 미안했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아빠와의 이별을 통해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단단히 뿌리내리고 살아가겠노라고.
*참고문헌 <천사들의 제국> 베르나르 베르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