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도 늘 관계가 어려운 나에게,

반추(Rumination): 쓰레기산이냐, 갤러리냐

by 틈새
”관계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라고들 하지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관계에 연연했던 경험이 있어. 그래서일까, 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위로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내게 남기기도 했어.


인간이 정말로 관계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어. 설리반[Sullivan]이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고 조절하며 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어. 그에게 있어서 성격은 ‘대인관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비교적 지속적인 패턴’이다. 그리고 불안은 이러한 ‘대인관계가 위협받거나 불확실해질 때 발생’해. 이처럼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기에 의문이 생겨.


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조언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조언은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오히려 상처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더 큰 슬픔을 초래하지 않을까?


쿨하지 못한 나는 과거 관계 속에서 받았던 상처를 자주 떠올리곤 했어.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추[Rumination]라고 해. 그렇다면 단순히 반추를 멈추면 될까? 그러나 그 말은 “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조언과 다를 바 없어 보였어. 나는 나의 예민함을 탓하고 싶지도, 타인의 투박함을 막연히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어. 대신, 반추라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어. (*반추는 과거의 경험을 계속 곱씹는 과정으로, 설리반은 이를 대인관계에서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거나 해결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개인은 자아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신경증적 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내 마음을 돌아보다가 찰떡같은 비유 하나를 떠올랐어.


나의 마음이 마치 하나의 갤러리와 같구나.


누군가의 마음은 아픈 마음들이 잘 잊히는 흐르는 강물을 닮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은 예쁘거나 즐거운 것들과 아프고 불편한 것들도 다 담아내는 갤러리를 닮아 있었어.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들의 얼굴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증오하거나 혐오했던 사람들의 얼굴들 또한 전시되어 있기도 했어.


성적 취향, 가난, 그리고 외모 등이 놀림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들은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이어. 그 충격이 나에게만 크게 느껴지는 것이 늘 의아했지. 그리고 그 마음들은 꼭 내 안에 어떤 거대한 쓰레기산처럼 모여 내 마음속에서 악취를 퍼뜨리는 듯했어. 현대미술에서는 쓰레기도 전시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내 마음에도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기 전까지만 말이야. 엄마는 종종 이렇게 물었어.


“너는 왜 불행했던 기억만 그렇게 선명하니? 그 불행이 왜 증오와 혐오로 번져서 너를 파괴하게 만드니?”


엄마의 말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떳떳하지 않았어.내 마음엔 행복의 향기와 불행의 악취가 늘 공존했지만, 엄마 말처럼 그 불행의 악취가 행복의 향기를 덮어버리는 것만 같은 순간들을 더 많이 살고 있는 듯 했으니까. 다행히 조금 더 커서 알게 된 건, 내가 망각의 능력이 부족한 대신,그 기억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내 마음의 갤러리를 하나씩 채워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만약 상처를 그대로 되갚았다면 내 마음은 단순히 황량한 공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갤러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 상처를 다시 보고 배우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뻔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관계였어. 니체[Nietzsche]는 그의 저서 ‘아침놀:도덕적 편견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을 사랑하도록 유혹하라


고 말했어. 이 문장을 메모해 두었던 이유는, 그것이 내가 반추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깊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야. 내마음의 갤러리는 내가 직접 채우고 꾸미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유혹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유혹을 통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악취의 근원지로만 여겨졌던 상처들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어. 그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의 과정이었어.


갤러리를 꾸리는 과정에서의 아픔을 부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그 상처들이 언젠가 작품이 될 것’이라는 말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지 몰라도, 고통이 너무 큰 이들에게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말들은아픔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의미를 가지는 허울 좋은 위로처럼만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


차라리 이런 말을 어떠니? 아프면 뼈 저리게 아팠으면 좋겠다. 너무 아프고 아파서 그 근원지까지 당신이 도달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으면 좋겠다. 뭐 그런 말들. 나는 나의 갤러리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울과 슬픔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하는 꿈을 꿔.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더 나아가 그 꿈을 우리가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해.


갤러리의 1호팬 나로부터.


P.S. 최근에 Robot Dreams(로봇 드림)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어. 이동진 평론가님의 극찬이 떠올라 아무 기대 없이 관람했는데, 말 그대로 폭풍 오열했어. 놀랍게도 관객을 울리려 작정한 장치가 전혀 없었는데도말이야. 영화를 보며 잊고 있었던 옛 사랑과 옛 사람을 떠올렸어. 마음속 갤러리 한 구석에 너무 아파서 따로 떼어놓았던 기억이었어. 하지만 숨기려 할수록 더 아팠다는 것을 그 순간 다시 깨달았지. 그 기억 위에 쌓였던 아픔의 먼지를 후후 불어내며 잠시나마 마음속에서 다시품어 보았어.

그리고 그 관계에서 배운 아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했어. 그래서인지 ‘전 애인은 다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면 조금 씁쓸해져. 그때의 나와 상대가 애썼던 시간들까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야. 오히려 그런 말들은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말인것같아. 예전에 꽉 잡았던 손이 누군가에게는 갑갑함일 수있다는 것을 배웠고, 이제는 손을 느슨하게 잡는 법을알게 되었는데, 이건 쓰레기가 할 수 없는 영역 아닌가, 갤러리의 순기능의 영역 아닌가. (물론, 재활용이 불가능한수준의 쓰레기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논외로 해야겠지만.)

설 연휴, 애증의 가족들을 만나며 관계의 어려움을 또 한번 느끼기도 했어. 취업, 결혼 등등 달갑지 않은 잔소리들 속에서 나는 그들의 말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또 시작이네하고 흘려보내며 내게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고자 노력했어. 예를 들면, 할머니가 곱게 모아둔 솔방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사촌동생이 회사에서 가져와할머니께 드린 촉감좋은 토끼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지. 관계에 연연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통제할수는 없겠지만, 관계를 쓰레기라고 칭하기보다는 갤러리라고 칭하며 내 방식대로 사랑해볼 수는 있는거야. 그노력이 언제나 성공하는건 아닐지라도, 어쩌다 한 번만의 성공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