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과 자책의 굴레에 빠진 나에게,

내면화된 수치심: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부끄러웠던 거야

by 틈새
칭찬을 받지 못하는 날이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죽음 대신 케이크를 먹었다.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지만, 비판을 받으면 마음이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어.부웅~하고 하늘로 높게 비상했다가 비상한 만큼 탁! 하고 추락하는 느낌.


어떤 기쁨은 너무도 커서 슬픔을 덮기도 한다는데, 나의 기쁨은 늘 슬픔의 크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 했어. 타인의 칭찬에서 오는 기쁨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작기만 한 걸까? 나조차도 싫어하는 내 모습을 들켜서 오는 슬픔은 내 안의 것이라 크기가 큰 걸까? 크기도 크기지만, 나는 겨우 타인의 인정 같은 것에 일희일비한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웠어.밥도 안 먹여준다는 그놈의 자존심이 몹시도 상했기에. 상한 자존심은 역설적이게도 나로 하여금 밥을 많이 먹게 했어. 이 말인즉슨, 자존심과 관련된 고통을 잊기 위해서 10대 때부터 폭식을 시작했다는 얘기야. 엄마는 왜 늘 혼자서 그렇게 먹냐며, 차라리 같이 맛있게 먹자고 하셨어.


그러나 나의 폭식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해받지 못한 감정과 고통이 만들어낸,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조금 슬프고 고독한, 나만의 언어였다.


친구들과 정상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폭식은 내 청춘을 조금씩 갉아먹었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제는 폭식 그 자체가 아니었어. 진짜 문제는 내가 그 폭식을 단순히 의지 부족이나 개인적인 약점으로 치부하며, 나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몰아세웠다는 점이야.


“다이어트는 의지 부족”이라는 흔한 말이, 내게는 “폭식과 우울도 모두 네 의지 부족 때문”이라는 자학의 근거로 들렸어.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점점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어. 그리고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지. 심리적 문제란 대개 단순한 인과 관계를 넘어, 슬픔의 사이클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그 사이클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을 대체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나중에서야 깨달았어. 내 폭식의 원인은 외모나 체중, 의지 부족이 아니라 *내면화된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울, 분노,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 이면에 수치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규정짓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내가 그렇게 무너지게 된 이유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비난했던 내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었나봐. (*내면화된 수치심이란 자신이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내면화하여, 자아 존중감이 낮아지고 자주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어린 시절의 비판적 경험이나 사회적 기준에 의해 형성된다.)


어느 날 뜬금없이 엄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


"네가 어렸을 때 그린 물고기 밑에 내가 바다를 표현한다고 줄 3개를 덧붙였던 게 자꾸 미안해서 생각이 나."


어렸을 때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엄마의 양육 방식은 언제나 한 발 먼저 나서서 나를 이끄는 식이었어. 내가 스스로 중상위권 정도면 괜찮다고 위로하던 어느 날, 엄마는 “최상위권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어. 그 말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 나름 중간자적 존재로서 잘하고 있다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기 때문이야. 엄마는 아마도 사회의 원리를 알려주고 싶었을 거야. 그러나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그것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사랑조차 공허한 말로 남게 되는 법이지.


여기에 입시, 외모, 자본 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더해져 어느새 나는 내가 ‘최상위’에 있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폭식과 자책을 반복했지. 문득, 이와 관련하여 내 인생 책, "인간실격"의 몇 글귀가 떠올랐어.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게 광대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

그 광대 짓이라는 가느다란 끈 하나로
인간과 간신히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

즉, 저는 언제부턴가 단 한 마디도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계속해서 ‘광대짓’을 하고 있었어.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나를 왜곡했어. 마치 엄마가 그린 선 위에서 나가 그린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았어. 겉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는 큰 문제였어. 내가 그린 물고기는 하늘을 날거나, 우주를 유영할 수도 있었고, 아예 민물고기와 같은 다른 품종의 물고기일 수도 있었기에. 특히, 염분 차이로 인해 바다에서는 살 수 없는 품종인 민물고기의 비유는 내 상황에 가장 적합했어. 종종 내 자신이 꼭 바다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민물고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야. 문득 “인간실격”의 또 다른 대목이 떠올랐어.


남에게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을라치면,
그래 맞아,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항상 잠자코 공격을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는 미칠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오늘 면접 스터디에서 신랄한 비판을 듣고 마음이 울적해진 차였기에 이 글이 더 와닿았어. 칭찬을 받던 때와 오늘의 차이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고, 몇 년 전 취업 면접에서의 실패 경험이 떠올랐어. 아픈 기억들에는 점성이 있는 게 분명해. 오늘의 기억이 그때의 기억을 끌어들일 때면, 사소한 일들로도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지곤 했으니까.


그래도 더 이상 ‘미칠 것만 같은 공포’에 빠져 잠식되기를 원하지 않았어. 예전처럼 감정을 피하려 들기보다는, 오늘의 울적함을 직면하고 그것을 이해하려 했어. ‘부끄러워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이 내 안에서 천천히 퍼져 나갔어. 그 순간, ‘그래, 부끄러울 수 있지’라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따스함이 내 공허를 감싸는 듯했어.


감정의 수용이 과연 변화를 가져올까 싶었지만,
이별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별이 가능하듯,
어떤 감정은 받아들여야 놓아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널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보고, 그렇게 키우고 싶었는데, 너는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사람이었어. 진흙만 보고 널 판단해서 미안해."


엄마는 이렇게 이따금씩 뜬금없는 얘기를 하셨어. 그 말들은 대개 감동을 주는 말들이었고, 물고기 얘기도 다이아몬드 얘기도 그랬어. 고통의 계절들을 지나 각자의 약함을 인정하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엄마는 그러셨어. 사회적 민감성이 기질적으로 높은 나는 여전히 평가에 영향을 받지만, 그 평가가 자주 틀리다는 것을 알게되었어. 그렇다면 남들이 입력하는 오류를 내 삶으로 출력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한 처사 아닌가? 그리고 그 자각은 조금씩 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듯했어.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날들, 사실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을 부끄럽게 느꼈던 순간들이었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어. 단지,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 감정이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그 방법으로 폭식을 택했을 뿐이었어. 그걸 깨닫고 나서야 민물고기가 죽음의 바다를 지나 생명의 민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 아마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싶어.


폭식에 대한 반응이 행위에 대한 자책이 아닌

행위의 이면에 담겨진 아픔에 대한 포용이 되길

바라는 나로부터.


P.S. 여전히 우울하면 케이크를 먹어. 다만 목적이 바뀌었어. 우울감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울해해도 괜찮다고 날 위로하기 위해 먹어.

폭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마저도 살기 위한 본인만의 몸부림이자 노력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노력의 방향만 조금 더 자기 파괴적이지 않게 천천히 바꾸기만 하면 된다고도.

많은 사람들이 폭식의 해결책을 절식이나 과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절식이나 과도한 운동은 폭식의 또 다른 씨앗일 뿐이야. 부디 폭식의 메커니즘을 알지도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폭식의 근원지인 자신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 추가로,지역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국가에서 무료로 하는 심리상담 서비스가 요근래 늘어난것으로 알고 있어. 꼭 센터까지 가지 않고도 화상으로도 가능하다고 하니 조심스레추천해 보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