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감정이 어려운 나에게,

정서적 민감성: 폭풍우도 누군가에겐 단비인 것 처럼

by 틈새


“우는 모습 꼴 보기 싫어.” 어릴 적, 엄마는 내가 우는 게 너무 속상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래, 부정적인 감정은 참 골치 아픈 존재야. 표현하면 불편하고, 참아도 불편하지. 하지만 숨기고 있으면 곪아버리고 말 거야. 참으면 없어지는 성질이 아니라, 참으면 터지는 화산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비밀 연애를 고수하는 애인에게 느낀 실망감, 모임에서 생일 선물을 준비하며 친구와 생각이 달라졌을 때의 억울함과 배신감, 종교를 강요하는 엄마에게 느끼는 답답함과 죄책감, 어딘가 코드가 맞지 않는 아빠에게 느끼는 피곤함과 죄책감. 너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감정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였어. 그런데, 도대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감정들을 마주했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더 혼란스러워.


‘그래, 화가 났어. 그런데 이 화를 어떻게 해야 하지?’ ‘실망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럼 이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감정의 이름을 붙이고 나서도 방향을 찾기 어려울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정서적 민감성(Emotional Granularity)을 떠올려. 정서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감정을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나누지 않아. 그들은 감정을 세밀하게 구분하고, 감정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 단순한 ‘화’가 아니라 억울함인지, 실망감인지, 배신감인지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지.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고만 있을 때, 감정을 세밀하게 인식할수록, 그 감정을 더 건강하게 다룰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건만… 아직 와닿지는 않는다.


실망감이라면, 기대가 어긋난 거고, 배신감이라면, 관계에서 신뢰가 깨진 거고, 죄책감이라면, 내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야. 감정을 잘게 쪼개어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이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선택해야 해.


실망감이 든다면, 내 기대를 조정할 것인지, 아니면 관계를 조정할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어. 배신감이 든다면, 그 사람과 신뢰를 다시 쌓을 수 있을지, 아니면 거리를 둘지 결정해야 해. 죄책감이 든다면, 진짜 내가 잘못한 게 맞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과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건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감정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거 아닐까? 그저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두려운 것 뿐이니 너무 겁먹지마.


어떤 감정은 표현을 해도 표현을 하지 않아도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감정은 날씨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먹구름이 내일의 먹구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그렇게도 몰랐다.


맞아, 감정은 항상 움직여. 지금 느끼는 배신감이 영원할까? 지금의 실망이 끝까지 날 지배할까? 아니, 감정은 흐르고 변해. 그렇다면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흘려보낼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건 어떨까?


그러니까 오늘은, 이 감정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두고 바라봐 주자. 아직 방법을 모르겠다면, 방법을 모른다는 감정조차 인정해 보자. 어쩌면, 그게 이 감정들을 다루는 첫 번째 걸음일지도 모르니까.


모든 감정을 소중히 하고 싶은 나로부터,


P.S. 모든 날씨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듯, 모든 감정 또한 그렇다고 믿어. 이 감정의 폭풍우 속에도 순기능이 있을거야. 자연 속에서 폭풍우는 오래된 가지를 정리하고, 굳어진 땅을 적시며, 새로운 싹이 틀 자리를 만든다고 해. 처음엔 모든 걸 망가뜨리는 것 같지만, 결국 더 튼튼한 나무와 풍요로운 땅을 남기는 거지.


감정의 폭풍도 그런거야. 실망은 나의 기대치를 돌아보게 하고, 배신감은 관계의 본질을 다시 점검하게 하지. 죄책감은 내가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알려주고, 분노는 나를 지키기 위한 경계선을 세우게 만들어주잖아. 그래 폭풍우를 피해 숨는 시간이 아니라 폭풍우를 보고 분석하며 성장하는 순간인거야. 그 순간을 진심으로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