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이 문장은 늘 오해 속에 놓인다. 사람은 원래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라는 냉소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말하는 지옥은, 타인 그 자체라기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굳어버린 ‘나’에 더 가깝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불안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타인은 나를 본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뜻이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유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해석 속에서 규정된 하나의 모습이 된다. 착한 사람, 예민한 사람, 문제 있는 사람,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 타인의 시선은 나를 설명해주지만, 동시에 가두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선을 너무 쉽게 내면화한다는 데 있다.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보겠지.”
“이렇게 행동하면 실망할 거야.”
그렇게 타인의 시선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자라, 어느새 내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때부터 지옥이 시작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볼 것이라 상상한 눈으로 스스로를 감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은 때로 지옥이다.
그 사람이 나를 비난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나를 심문하기 시작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 인정이 주는 무게에 짓눌린다. 사랑받고 싶어 가까워졌는데, 가까워질수록 더 조심하게 된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내가 뭔가 잘못했나”를 먼저 떠올린다. 이때 타인은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판정하는 재판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정말로 타인이 우리를 그렇게까지 규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를 먼저 죄인석에 앉혀두고 있는 걸까?
많은 경우, 타인은 생각보다 덜 생각한다. 각자의 삶에 바쁘고, 각자의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머릿속을 과대평가한다. 마치 그들이 하루 종일 나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을 것처럼. 사실 그 지옥은 타인의 방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지어진 가상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완전히 배제한 삶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상처받고, 또 회복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멈추면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타인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출구가 될 수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맡길 때 지옥이 되고,
타인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둘 때 관계가 된다.
공감이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전히 규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에 가깝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남겨주는 것. 그 공간이 있을 때 타인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결국 이 문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가?”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순간, 지옥은 자동으로 열리고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볼 때, 그 지옥에는 비로소 출구가 생긴다.
타인이 문제라기보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전부 맡겨버린 순간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타인은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