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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담 Sep 08. 2023

장미 한 송이와 축제

 쿵쾅쿵쾅 아직도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이 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러 너에게 전해질까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빈 강의실에 들어서서야 멈춰서서 숨을 들이킨다. 이마의 땀을 닦으려 손을 드니 꽉 움켜 쥔 손에 줄기 휜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보인다.


내일 나랑 축제 같이 가지 않을래? 파트너가 되어줘.


 이 녀석은 이렇게 늘 일방통행이다. 오전에 뜬금 없이 강의동 앞에 나타나선 맥락 없이 장미 한 송이 건네며 한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 돈다. 친구들의 야유인지 응원인지 "받아줘, 받아줘" 라는 멘트와 박수를 뒤로 하고 그저 내달렸다. 답을 했던가 기억도 없다.

 다소 진정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장미를 쳐다보니 픽 웃음이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에게 받은 꽃이자 인생 첫 데이트 신청이라니. 그것도 가람이에게. 한가람. 이 맥락 없는 녀석과의 재회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능 당일 어젯밤의 악몽으로 뒤숭숭하게 집을 나선 나는, 응원하는 가족 없는 휑한 자취방이지만 씩씩하게 도시락을 챙기며 마음을 다잡는다. 버스 정류소로 향하는 거리에서 달리는 오토바이가 튄 흙탕물에 바짓단이 엉망이 된다. 솟구치는 화를 겨우 누르고 다시 마음을 잡고 고사장으로 들어간다. 또 하필 첫 줄, 재수가 영 없는 하루이다. 앉자마자 뒷자리에서 어깨를 톡톡 치길래 고개를 돌리니, 웬 남학생이 컴싸를 빌려 달란다.

이런, 언제 봤다고. 수능에 컴싸도 없이?

하나밖에 없다고 무시하니, 다시 등을 찌르며

지우개 빌려 달란다. 뭐지? 것도 하나밖에 없다 하니,

내껄 둘로 나눠주면 안되냐고. 제길, 귀찮아서 비틀어 쪼개 나눠준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미친 놈. 너도 수능으로 제 정신이 아니구나.

대한민국이 고3을 미치게 만드는구나 싶어 너그러이 용서한다. 이런저런 재수 없는 일에 비해 어라? 시험이 술술 풀린다. 역시 액땜인가 싶다. 기분 좋게 점심 시간을 맞이한다.

또 뒷자리 남학생이 같이 먹자며 말을 건다. 저 아세요? 라고 싸늘하게 반문하니, 나 몰라? 김하늘?이라는 능청스런 미소 가득한 얼굴. 그제서야 웃는 눈 마주보며 자세히 쳐다보니, 대박 잘생긴 면상의 훈남이다. 누구지? 내 주변에선 볼 수 없는 고퀄의 외모다.

섭섭한데, 라며 얼굴을 가까이 디미는 그.

OO중학교 1학년 7반 한가람, 나.

누구? 가람? 네가?

그 쪼그마한 키에 여드름투성이던 안경잡이가? 말도 안 돼.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환골탈태를 한 거지?

난 너 어제 소집일 날 바로 알아봤는데. 넌 여전히 하얀 얼굴 그대로이구, 주위 신경 안 쓰는구나. 무지 반가웠어.     


  수능을 마치고 나란히 고사장을 나가며, 얘랑 내가 기억할 만한 추억이 있었던가 곱씹어 보아도 생각나는 게 없다. 중1 시절, 아예 나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은 학생이었고, 나는 중1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 학교를 떠나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3년을 보낸 후 고3학년 1학기 초에 다들 말도 안 된다며 말리는 과감한 전학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터였다. 아니,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그 시골에서, 그리고 전학 후에도 온 시간을 공부에만 매진한 일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옆에게 뭐라고 자꾸 말 시키는 가람이 신경 쓰인다. 뭐가 좋은지 자꾸 히죽거린다. 성격이 참 좋다. 얼른 헤어져야겠다 싶어 원하는 대로 연락처를 주고 받고 버스에 올랐다. 창가에서 보니 계속 손을 흔들어댄다. 옆에 선 여학생 둘이서 잘생겼다며 수근대고 웃으며 나를 힐끔댄다. 인스타 팔로워에 가람의 이름이 뜨고 '가람의 하늘 '이란 프로필과 온통 푸른 하늘 사진이 보인다. 

 헉~! 이거 내 이름인 걸 알고 쓴거야, 그냥 쓴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중1 수련회에서 가람이와 일이 있었네.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제사 기억이 났다. 풋! 경주로 가는 수학 여행, 버스에 탑승 시 짓궂은 담임께서 버스 내 장난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학생만 먼저 한 줄로 앉게 한 후 남학생들이 선택하여 그 옆자리에 앉도록 했다. 난 중간 뒤 쯤 창가에 앉아 바로 눈 감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탓에 누가 옆자리에 앉았는지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때 가람이가 내 옆자리에 앉았었다. 조그마하고 여드름투성이의 그에게 관심 두지 않았고 별 얘기를 나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불쑥 다가온 가람의 얼굴.

어? 너?

그냥 헤어지기 넘 아쉽쟈나. 달려와 탔지. 너 내 생각했지?

나의 회상이 눈으로 보였나 싶어 깜짝 놀랐다.

너 그 때 나한테 껌 줬었어, 기억나? 글쎄.

난 계속 너 보고 있었는데, 너 자는 모습도 되게 이뻤어. 난 학교에서도 항상 너 보고 있었어. 넌 주위 눈길을 안돌리더라, 좀 슬펐어.

‘헐, 변태... 난 왜 웃고 있지?’

다시 만나 무지 반가워. 너와 함께 할 대학 생활이 완전 기대 돼, 잘가. 라며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훌쩍 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입학을 했고 같은 캠퍼스를 니는 동창이 되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희한하게 가람이와 자주 부딪히는 바람에 주위 친구들의 눈총도 받고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도 꽤 받으며 장미의 계절 오월이 다가왔다. 어느샌가 학교 식당엘 가거나 도서관에 들어서면 혹시 가람이가 있나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화끈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오월은 학교 축제가 열리는 달이다. 공과 대학은 건물 앞 너른 잔디 부지를 둘러 휀스를 설치한 후 각종 공연과 댄스 타임 등 행사가 학부 단위로 이뤄진다. 단 학교 전통에 따라 파트너가 없으면 입장 불가이고, 초대된 파트너는 붉은 장미를 들고 와야 한다. 말도 안되는 구닥다리 전통이라 여기고 말았는데, 오늘 가람에게 장미를 받은 것이다. 황당하게, 그러나 기쁘게.


나랑 축제 같이 가지 않을래?


 겨우 제 박동으로 돌아온 심장을 쓰다듬으며 "가 주지 뭐, 마침 딱 내일 시간이 남네."라 답을 보낸다. 세어보진 않았으나, 하트 수십 개와 내일 보자는 가람의 문자가 바로 왔다. 내일은 붉은 장미에 어울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어야겠다며 장미향을 맡으며 캠퍼스를 나선다. 발걸음이 가볍다. 


가람의 하늘이 푸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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