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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담 Nov 01. 2023

악몽의 편의점

불신시대

  기억은 다소 왜곡되기도 하고, 완전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뇌리에 박혀 한 토막도 잊히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기도 다. 좋은 기억이라면야 두고두고 힘이 되겠지만, 악몽 같은 기억이라면 잊지도 못하고 아픔이 되어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성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편에 각인된 그날이 떠오른다.


 '편세권'이란 말이 널리 쓰일 정도로 현대인에게 편의점은 가깝고도 필요한 곳이다. 편한 복장으로 걸어 갈 수 있는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품목이 1+1이거나 2+1이라도 하면 횡재한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편의점 브랜드마다 조금씩 다른 품목의 맛 차이를 즐기는 재미도 있다. 24시간 상시 운영에 이름값 그대로 택배 업무에 간단한 은행 업무까지 가능하니 정말 꼭 필요한 곳이다. 도시의 그 찬란한 네온 사이에서도 더더욱 밝은 편의점의 불빛은 유혹 그 자체이다.


  우리 아파트 근처 상가에도 편의점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00편의점이 규모도 크고 위풍당당하게 자리하여 늘 손님으로 북적인다. 인근 다른 편의점에 비해 품목도 더 다양하고 바로 옆 은행을 끼고 있고 카페며 병원 등 생활시설과 중, 고 학교 옆이라 시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장소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그 편의점 쪽으론 쳐다보기도 싫어하고, 규모는 더 작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빙 둘러 다른 곳으로 간다. 아직 악몽의 그 편의점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현대사회의 불신을 그대로 보여준 악몽같은 그날 그곳의 하루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내 아이에게 가해진, 신체 폭력보다 더 가슴 아픈 언어폭력을 가한 그곳 점주님, 잘 살고 계신지 궁금하다.


  한창 입시에 매진하던 고2 딸의 생활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단순하나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딸을 아는 이는 모두 인정하는 바, 긍정 에너지와 해피 바이러스로 똘똘 뭉쳐진 성격이라 왠만해선 기 죽지 않고 항상 웃으며 즐겁게 힘든 시기를 버텨주는 딸이 그저 감사한 시기였다. 어딜 가더라도 만나는 사람마다 다 좋다 그러고 즐겁다 말하는 아이의 내면에 혹여 말 못할 어둠이 있을까 조심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날은 학원 보강이 있던 어느 토요일이었고,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었으나 연락이 없어 기다리던 중이었다. 때마침 폰이 울려 받았는데, 난데없이 울먹이며 "엄마, 나 집 옆 00편의점인데."라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니 통곡을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심장 박동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온 몸을 감싸는 공포에 나는 폰을 끄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뛰는 중에도 다시 전화하며 대충 들은 사연은 이러했다. 학원을 가기 위해 편의점에서 교통카드 2만원을 충전했고, 버스에 탑승했으나 잔고가 없는 것으로 찍혀 황당했지만 일단 현금으로 지불하고 학원 수업을 들었다 한다. 수업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충전이 안 된 사연을 얘기했더니, 분명히 충전을 했으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로 응대하기에 정말 충전이 안 되었다 해도 믿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딸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여기에 충전하러 왔고, 바로 버스를 탔는데 충전이 안 됐더라네요.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어머니, 이런 학생들 많아요. 충전한 걸 다른 데 써 놓고 안 됐다고 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학생, 솔직히 말하지?

   아니, 그런 학생들이 있다고 우리 딸도 그렇게 보시면 안되죠. 거짓말할 애가 아닙니다.

   우선 학생하고 다시 잘 얘기해 보세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딸 단속부터 하시죠.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CCTV에 딸이 카드를 내밀고 현금을 지불했으며, 주인이 단말기에 카드를 꽂는 장면까지 보이니 그는 분명 딸이 거짓말을 했다고 확실히 믿는 모양이었다. 이미 딸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자기는 아니라고,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뒤 늦게 소식 듣고 달려온 남편은 이미 딸을 불량학생 취급하는 주인에게 화가 치민 상태라서 큰소리가 오갔다.


   당신들이 뭔데 우리 딸을 그렇게 취급하는 거요? 애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확실히 알아봐주면 되는 일인데, 왜 애를 의심부터 하는 거요?

   이보세요, 학생들 말은 다들 그렇게 합니다. 그만 가세요. 여기 손님들 많은 거 안 보이세요? 이거 엄연한 영업 방해입니다.

   뭐요? 당신들 그런 마음으로 동네에서 서비스 장사하는 거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예, 해보쇼. 경찰한테 물어봅시다.


  결국 정말로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까지 갔고, 딸과 우리는 다시 사연을 재반복 얘기했다. 좋게 해결하라는 너무나 쉬운 합의를 권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처음 대면한 경찰과의 심문에서 우리는 심장이 벌렁거렸고 억울함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결코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는 주인의 무시하는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단 한 번도 "학생, 곤란하고 황당했겠네. 어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볼게요."라는 그 쉬운 말 한번 하지 않았다. 본인의 영업장에서 일어난 서비스의 오류임에도 오로지 상대의 잘못이라 확신하고 밀어내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하필 토요일이라서 카드회사 문의조차 되지 않아 더욱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딸을 1도 의심하지 않는 우리는 일단 딸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2만원 없는 셈 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무턱대고 그렇고 그런 불량학생 취급 받은 억울함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아이가 자라면서 사회를 믿고, 사람을 믿으며 제 뜻을 올바르게 키워갈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그럴 수 있다는 말로 위로하기에는 너무 칼같은 말을 들은지라 쉽게 눈물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늘 딸을 믿고 응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그런 사람의 말보다 엄마 아빠의 따뜻한 포옹과 믿음에 다시 맑은 눈을 보여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조금만 돌려 생각해도 본인의 실수일 수 있는 일을 무작정 상대방의 악의로 인한 거짓이라고만 치부하고 귀를 닫아버린 그분들은 자식을 키우지 않을까. 믿음이니, 신뢰니 하는 말들을 교육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사회에 불신이 팽배해 있다니 결국은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수많은 군상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리라 짐작은 되고, 정말로 악의를 지닌 몇몇 학생들의 거짓으로 손해를 보았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 한들 모두가 그러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고 응대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결국 다음주 월요일 카드 회사에 확인한 결과, 단말기까지 정보가 수신되기 전에 주인이 급하게 카드를 뽑아서 충전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만원을 환불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순히 환불로 마무리될 일인가. 아이가 받은 상처는 이미 가슴 깊이 파여 문득문득 상처로 도드라질텐데. 다시 찾아가 정식 사과를 받게 해 주고 싶었으나, 딸은 결코 다시는 그 사람들 얼굴도 보기 싫다하여 그만 두었다. 딸의 상처를 다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부모로서 회피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모르겠다. 사회의 잘못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시정을 당당히 요구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지 못한 비겁한 부모가 되어 버린 날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편의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온갖 편의를 다 봐주는 대신 결코 신뢰니 포용이니 따위는취급하지 않는 차디찬 불편의를 체험한 그날. 차가운 불신의 칼날을 온몸으로 맞은 악몽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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