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치유와 위로/박영란저
숲을 끼고 온통 초록이 무성한 정원에, 키 넘어 자란 수풀에 가리운 듯 숨어 있는 주택에서 2년만 잠시 살자는 가족과 비밀스런 할머니와 그 손자들과의 인연을 잔잔히 그려낸 소설이다.
<시공간을 어루만지면>이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집은 잘 있어?"라는 뒷표지 문구가 더욱 궁금했다. 표지의 파릇파릇함이 일단 딱 내 스타일이다.
유년 시절 시골 외가 강가에 위치한 초록 지붕, 초록 잔디의 빈 별장을 생각나게 했다. 입장이 허락된 그곳은어린 시절 우리들의 만만한 놀이터였고, 언젠가는 살고픈 로망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유럽 옛 고성의 공주님이 되어 종일 시간을 보내곤 했다. 푸른 잔디밭 위에서 한껏 멋부린 자세로 찍힌 사진 속 유년의 나는 티없이 맑다. 지친 삶 속에서 가끔 꺼내보면 그저 미소 짓게 되고, 위로가 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성장의 그늘을 따스히 보듬는
작가 박영란이 내미는 온기 어린 손길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는 안식처를 의미한다. 스페인의 유명한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와 결투를 벌이던 소가 지친 몸을 잠시 쉬는 곳이란 의미에서 기원하여 지친 이들을 다시 회복해 주는 안식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숨을 고르고 몸을 편안히 하여 재충전 후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퀘렌시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같은 장소라도 더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과 계절이 있을 것이고, 그 시간 그 곳에서 누구와 무얼 하는가에 따라서도 안락함은 차이가 날 것이다.
유달리 편한 곳은 그야말로 그 공간 그 시간과 내가 하나로 어우러져 녹아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저 원래 그 속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좋다.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간 안도감과 안락함을 주는 그런 곳이 있다. 그런 곳에서 잠시라도 머무르고 나면 다시 온몸에 가득차는 온기로 또 살아내는 것이다.
이 소설 속 고3 '나'의 가족들에게 이 년만 살자고 들어온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겪는 사건들이 그런 위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귀향과 그로 인한 가족의 이별을 견뎌야 하는 나와 어린 준에게 1층에 몰래 숨어사는 서백자 할머니와 세 손자와의 인연은 마치 다른 세계의 존재들마냥 신비스럽고 비밀스럽지만 그 끈끈한 가족애에 위로를 받는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할머니 가족과 부대끼면서 슬픔을 이겨내는 힘을 키우고 단단해지면서 아버지의 그늘도 보듬을 수 있는 성숙으로 한 단계 나아간다.
그 때 할머니는 인생을 두고 너무 아름다운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인생이 분명 있을테지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게 아름다운 인생은 아니라고 했다. - p514
먼저 경계를 넘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그리고 나와 함께 경계를 넘으려고 기다린 엄마, 나보다 먼저 용기를 낸 동생. 평생을 살거라 여겼던 집에서 호쾌하게 떠난 서백자 할머니. 그들의 마음이 나한테 전해진 그날이었다. -p155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분명한 세계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세계, 정신과 마음속의 세계, 무수히 많고 영원한 원자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는 세계가 뒤섞여 각자의 시공간을 이룬다는 것을 어렴풋이 받아들였다. - p157
성장통을 겪은 주인공 가족이 이제는 지나온 세월 속에서 굳건해지기를, 인사 잘 하고 헤어졌으니 이제는 평안하기를 바라는 시공간의 위로를 나역시 받아본다. 잘 멈추고, 잘 견딘 시공간에서 새로운 힘을 얻은 가족에게 "잘 있니?"라고 나도 인사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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