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살아가는 것들을 굳이 글로 형상화하여 읽고 먹먹하게 만드는 정이현 작가를 좋아한다.
단아한 외모에 숨은 그녀의 서늘하면서도 온도 품은 문체를 좋아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 문학과 지성사) 속 여주 '유리'를 통해 이 사회에 강요된 여성상을 날카롭게 헤석한 그녀에게 반했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 (2006, 문학과 지성사)의 '오은수'(드라마에서 최강희 이미지와 딱이다^^)와 친구들을 통해 회색 도시에서 여러 역할을 짊어지고 살아가면서도 달콤한 꿈을 꾸는 우리들의 달콤하지 않은 도시 속 '나잇값'에 대해 오래 생각했었다.
그녀처럼 나도 나이를 삼키며 삶에 젖어 살았다.
그러다 다시 꺼내든 그녀의 또다른 책들....옛 기억 속 나의 젊음을 대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소 격앙되어 말하던 그녀는 다소 차분하게 가라 앉은 목소리로 그저 우리 주변에 살아가고 있는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옆에 늘 같이 있었으나, 알지 못했던 이웃의 이야기. 다소 담담하게 써내려간 서사이나, 그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안녕, 내 모든 것>-각자 아픔을 지닌 19세 3인의 치유과정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비효율적인 인생이다. 절망스럽지는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애써봐야 달라지는건 없다.
조용히 닳아간다는 서른 전 지혜는 19살 비밀을 같이 공유했던 친구 세미가 학원으로 찾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의 처음과 끝은 대학교수 부모님을 두고 고교 내내 학습에 시달리나 정작 친구는 없었던 지혜 관점의 1인칭 시점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엄마의 도피행으로 갑자기 친가에 보내져 겉으로는 화려하나 세속적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진저리치는 세미가 1인칭 서술자이고, 부모의 갈등으로 욕이 티어나오는 틱장애가 점점 심해지는 준모가 1인칭인 경우도 있다.
19세 절친 세 친구들의 내면이 각자 서술자가 되어 농도짙게 그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그 기억을 더듬어 과거 장소를 찾아가나 무엇도 확인할 수 없다. 짓궂은 신이 불가사의한 미소를 띠고 내려다 보는 것처럼 어느 것도 믿을수 없다. 그제서야 긴 터널을 걸어온 옛 친구에게 "그런데 요즈음 너의 삶은 어떠니?"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그리고 뒷얘기처럼 첨부된 그들의 비밀스런 사건.
작가말처럼 맞서 싸울 절대악조차 없는 속되고 불확실한 세계.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그들의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틈.그 틈을 작가는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P228
▶<말하자면 좋은 사람>-다들 잘 살아가고자 하는 흔한 우리 주위 좋은 이웃들의 짧은 이야기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누워서만 울 수 있는 어른이 됐다
-시작부터 외롭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당신이 무척 섬세하고
강인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들꽃처럼 당신은 잘 살아야 합니다.
나도 그러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일들만이 이 도시의 기적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각자가 한가득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삶에 위로는 주는 말이다.
면접에서 계속 탈락하던 중 자기소개서 내용이 우수하여 바로 채용됐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방문했으나 결국 신입들에게 비싼 교재부터 사라는 곳에서 갈등하는 그녀.
김나나란 가명으로 페이스북에서 가짜 모습 가짜 생활로 포장하며 교류하는 민우엄마 김미경 씨.
초등 6학년 시절, 기억의 이미자는 분명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던 따였으나 어른이 되어 '밴드'어플에서 만난 그녀의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친절하고 상냥한 터줏대감으로 친구들을 맞는다.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듯 달라진 이미자를 동창모임에서 확인하러 가는 나.
12월 31일 남친과 헤어지고 1년 뒤 12월 30일, 시티투어가 있는 S시에 느리게 가는무궁화호를타고 무작정 도착한 희정.
결혼을 앞두고 한겨울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가 폭설로 고속도로서 고립되고 시동도 꺼지는 악조건에서 다투곤 화해하나 차키를 잃어버리는 남자와 여자.
무작정 걷다 들어간 점 봐준다는 천막에서 뾰족한 모서리에 서 있는 것같다는 나에게 꼭 섬에 가서 태우라는 부적을 만 오천원에 산다. 닷새 후 황량한 제부도에 갔으나 바닷바람에 다 태우지도 못 하고 돌아온18세 학생.
차 있는 선배들의 반대에도 신차를 출고했으나 이미 만차인 그의 빌라주차장에는 주차를 못하고 빙빙헤매다 대로변에 주차, 다음날 주차위반 경고스티커를 받은 그.
-어쩌면 내 이야기인지 가족인지 친구인지...옆집 이웃 이야기인지 그렇고 그런 흔한 이야기이나 너무나 곰감되면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세속적 폭력의 속물성 바라보기
우리는 서서히 소멸해 갈 것이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렇게 서로 닮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소설로 쓸 수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들의 인물들은 다소 메말라 있다. 표정 없는 그들의 삶을 작가 역시 메마르게 그들의 삶을 써내려가는 듯하다. 낯설지 않은 이웃들의 이야기이나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최악을 모면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나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여인 미스조와 교우가 시작되고 결국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였다며 키우던 거북이를 상속으로 남겨 떠맡게 된 나.
수학여행 다녀온 딸이 쓰러져 간 병원에서 곧 출산을 해야한다는 말을 들은 엄마 지원, 아들 수학여행 간 기간 남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새우를 구우려다 프라이팬 유리뚜껑이 터져버려 고객센터에 전화했으나 응대 방법에 화가 나던 중 아들 여자친구가 출산을 했다는 전화를 받은 엄마 미영.
배다른 형에게서 불쑥 연락이 와선 아픈 아버지 살해에 가담해 달라며 거액을 건네받았으나 그 후 연락이 없었고 과연 그 D-DAY에 거사를 실행했는지 모른 채 살았으나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남우.
전셋값을 올리느니 다소 무리하더라도 집을 장만하기로 하고 시세보다 싼 집을 찾았다며 잘 살아보자했는데 이사 전날 찾아간 그 집은 아내가 목 맨 후 악취 나는 쓰레기더미 속에 살고 있는 남자의 집.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들이나 또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닌 일들...그건 사건을 접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태도에서 이 시대를 읽을 수 있고 작가는 이를 '기만적'이라 생각했나보다. 말 그대로 상냥한 폭력의 시대.
다소 불온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했으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녀의 작품들. 현대인, 특히 여성의 감수성을 잘 녹아내는 작가의 다음 글도 기대해 본다.